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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편 정음청 운영, 한글 보급 노력 - 새 문자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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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400자)

    "여러분,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셨다는 건 다들 아시지요? 근디 말이여, 만들기만 했다고 끝이 아니란 말이지! 그 어려운 한자를 쓰던 시대에, 백성들한테 새로운 글자를 가르친다는 게 얼매나 어려운 일이었겠소? 양반들은 반대하고, 백성들은 배울 곳이 없고... 그래서 세종께서 뭘 하셨는고 하니, 정음청이라는 특별 기관을 만드신 거라! 거기서 한글 교과서를 만들고, 선생을 양성하고, 온 나라에 퍼뜨리는 대작전을 펼치신 거여. 오늘은 그 감동적인 이야기, 한글이 어떻게 백성들한테 전해졌는지 들려드리겠습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훈민정음 창제 후, 세종대왕은 정음청을 설치하여 체계적인 한글 보급 사업을 펼쳤습니다.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언문 교재를 만들고,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서적을 간행했지요. 양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끝까지 한글 보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상에서는 한글이 어떻게 온 백성의 글자가 되었는지, 그 감동적인 과정을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풀어냅니다.

    ※ 훈민정음 반포 후

    자, 여러분. 세종 28년, 서기 1446년 9월의 일이었습니다. 훈민정음이 드디어 세상에 반포된 거지요. 세종대왕께서 직접 서문을 쓰시고,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해례본을 완성해서, 온 나라에 알린 겁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그 유명한 서문 말이여. 근디 말입니다, 반포했다고 해서 바로 백성들이 한글을 쓰게 됐을까요? 천만에요! 오히려 큰 혼란이 일어났단 말이지.
    먼저, 양반들의 반응이 어땠는고 하니...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학자들이 상소를 올렸어요.
    "전하,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화의 문자를 써왔사옵니다. 이제 와서 새로운 문자를 만드시니, 이는 오랑캐의 문자를 본받는 것이옵니다!"
    최만리의 상소가 얼매나 격렬했던지, 세종께서 진노하셔서 최만리를 옥에 가두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근디 양반들의 반대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성균관의 유생들도 들고 일어났지요. "한문을 버리고 언문을 쓴다니, 이는 조선이 오랑캐 나라가 되는 것이옵니다!" 하면서 집단으로 반발한 겁니다.
    그럼 백성들은 어땠을까요? 실록에 보면, 한양 저잣거리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글자라... 우리 같은 상놈들도 배울 수 있다는디..."
    "근디 누가 가르쳐주겠소? 글방도 없는디..."
    "양반님들도 반대하시는디, 우리가 배워서 뭐하겠소?"
    백성들은 호기심은 있었지만, 어디서 어떻게 배워야 할지 몰랐던 겁니다. 당시 조선은 한자만 쓰던 나라였잖아요? 글방, 즉 서당도 모두 한문만 가르쳤고요.
    더 큰 문제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너무 어려웠다는 겁니다. 28자의 글자는 만들었지만, 그걸 설명한 책이 한문으로 되어 있으니, 백성들이 읽을 수가 없었던 거지요.
    세종께서도 이 문제를 아셨습니다. 실록 세종 28년 10월 조에 보면, 세종께서 신하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신 기록이 있어요.
    "짐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백성을 위함이거늘, 정작 백성들이 배우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집현전 부제학 신숙주가 아뢰었습니다.
    "전하, 신이 생각하옵건디,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 할 것 같사옵니다. 또한 이를 가르칠 사람들을 양성해야 하옵고..."
    "그렇다. 경의 말이 옳도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최항이 나서서 아뢰었지요.
    "전하, 신이 건의하옵건디, 특별한 기관을 하나 만드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오직 훈민정음 보급만을 담당하는 기관 말이옵니다."
    세종께서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좋은 생각이로다. 즉시 준비하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정음청'입니다. 훈민정음을 백성들에게 보급하기 위한 특별 기관이었던 거지요.

    ※ 정음청 설치

    세종 28년 11월, 경복궁 안에 정음청이 정식으로 설치되었습니다. 실록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정음청을 설치하고, 집현전 학사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을 임명하다."
    여러분, 이 이름들 좀 보세요. 조선 최고의 천재들이 모인 겁니다! 집현전의 핵심 인물들을 다 끌어모아서, 오직 한글 보급만을 위한 팀을 만든 거지요.
    정음청의 수장은 정인지였습니다. 정인지가 첫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여러분, 우리의 임무는 무겁습니다. 전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훈민정음을, 온 백성이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옵니다. 이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사업이옵니다!"
    신숙주가 손을 들었습니다.
    "대감,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옵니까?"
    정인지가 펼쳐놓은 계획서에는 세 가지 큰 목표가 적혀 있었어요.
    첫째,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언문 교재를 만들 것.
    둘째, 훈민정음으로 된 서적을 대량으로 간행할 것.
    셋째, 전국에 언문을 가르칠 선생들을 양성할 것.
    박팽년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은 계획이옵니다. 근디 예산은 충분하옵니까?"
    세종께서는 정음청에 파격적인 지원을 하셨습니다. 실록을 보면, 호조에서 정음청에 특별 예산을 배정한 기록이 있어요. 당시 금액으로 은 5천 냥이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돈이지요.
    또한 주자소, 즉 인쇄소를 정음청 전담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글 서적만 찍어내는 인쇄소를 따로 운영한 거예요.
    성삼문이 제안했습니다.
    "대감, 신이 생각하옵건디, 먼저 궁궐 안에서 시범 사업을 해보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궁녀들과 내시들에게 먼저 가르쳐보고, 그 방법을 정리해서 밖으로 퍼뜨리는 것이옵니다."
    "오, 좋은 생각이로다!"
    정인지가 무릎을 쳤습니다. 실록에 보면, 세종 29년 정월부터 궁궐 안에서 한글 교육이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먼저 궁녀 50명을 선발했습니다. 나이가 어리고 총명한 궁녀들이었지요. 이선로와 강희안이 직접 선생이 되어서 가르쳤습니다.
    첫 수업 광경을 상상해보세요. 궁녀들이 마루에 앉아서, 큰 글자가 적힌 판을 보면서 따라 읽는 거예요.
    "ㄱ, ㄴ, ㄷ, ㄹ..."
    "ㅏ, ㅑ, ㅓ, ㅕ..."
    강희안이 말했습니다.
    "자, 이제 합쳐봅시다. ㄱ과 ㅏ를 합치면?"
    "가!"
    궁녀들이 일제히 대답했어요. 강희안이 흐뭇하게 웃었습니다.
    "맞습니다! 참 잘했어요. 이렇게 쉬운 것이 바로 훈민정음이랍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문을 10년 배워도 제대로 읽지 못하던 궁녀들이, 한글은 단 3일 만에 읽기 시작한 겁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궁녀들이 간단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보름이 지나자,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선로가 감격해서 세종께 보고했습니다.
    "전하, 기적이옵니다! 궁녀들이 벌써 글을 쓰고 있사옵니다!"
    세종께서 직접 궁녀들을 불러서 시험을 보셨습니다.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소녀 옥분이옵니다."
    "그럼 네 이름을 써보거라."
    궁녀 옥분이 붓을 들어서 종이에 또박또박 썼습니다. '옥분'. 세종께서 눈시울을 붉히셨다고 합니다.
    "아름답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글씨로다..."

    ※ 언문 교재 제작

    궁궐 안 시범 사업이 성공하자, 정음청은 본격적으로 교재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근디 말이여, 교재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세종 29년 2월, 정음청 회의실에서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정인지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백성들에게 줄 첫 번째 책을 무엇으로 할까요? 천자문처럼 한자를 가르치는 책을 만들까요?"
    신숙주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옵니다, 대감. 그러면 한문 공부와 다를 게 없지 않겠사옵니까? 순수하게 훈민정음만으로 된 책을 만들어야 하옵니다."
    "그럼 무슨 내용을 담으면 좋겠습니까?"
    박팽년이 제안했습니다.
    "신이 생각하옵건디, 우리 조선 왕조의 역사를 담으면 어떠하옵니까? 태조 대왕부터 전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을 노래로 만들어서 말이옵니다."
    성삼문이 무릎을 쳤습니다.
    "좋은 생각이옵니다! 노래로 만들면 백성들이 쉽게 외울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용비어천가'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9년 4월 조에 보면, 용비어천가 편찬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정인지, 안지, 권제 등이 한문으로 먼저 내용을 짰습니다. 그리고 그걸 훈민정음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지요.
    "해동 육룡이 나르샤..."
    첫 구절입니다. 육룡, 즉 여섯 마리 용은 조선을 세운 여섯 분의 선조를 뜻하지요.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을 말합니다.
    신숙주가 이 구절을 훈민정음으로 옮기면서 고민했습니다.
    "'나르샤'가 맞는가, '나르사'가 맞는가..."
    한글 표기법도 정해야 했던 겁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서 만들었어요.
    6개월이 걸려서 용비어천가 125장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께서 직접 검토하시고, 수정 지시도 내리셨어요.
    "이 부분은 백성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구나. 좀 더 쉽게 고쳐보거라."
    용비어천가가 완성되자, 주자소에서 인쇄에 들어갔습니다. 실록에 보면, 첫 판본이 100부 찍혔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근디 세종께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세종 29년 7월, 또 다른 대작을 구상하신 거지요.
    "짐이 직접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옮기고자 하노라."
    신하들이 놀랐습니다.
    "전하께서 직접 하시겠다옵니까?"
    "그렇다. 어머니 소헌왕후께서 돌아가셨을 때, 짐이 극진히 명복을 빌지 못한 것이 한이로다. 이제라도 불경을 우리 글로 옮겨서,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자 하노라."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월인천강지곡'입니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노래한 불경이었지요.
    세종께서 직접 한문 불경을 읽으시고, 훈민정음으로 옮기셨습니다. 밤늦게까지 촛불을 켜놓고 집필하시는 바람에, 신하들이 걱정할 정도였어요.
    "전하, 옥체를 돌보셔야 하옵니다!"
    "괜찮다. 이 일만은 짐이 직접 해야 하느니라."
    월인천강지곡은 580여 장의 방대한 분량이었습니다. 여기에 세종께서 직접 지으신 '월인석보'까지 합쳐서, 총 1,000장이 넘는 대작이 완성되었지요.
    이 두 책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한 책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과서이자, 우리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백과사전이었던 겁니다.

    ※ 한글 교육 시범 사업

    세종 29년 가을, 정음청은 본격적인 교육 사업에 착수했습니다.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이걸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쳐야 했던 거지요.
    근디 문제가 있었습니다. 누가 가르칠 것인가? 당시 조선에는 서당 훈장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한문만 가르쳤거든요. 한글을 가르칠 선생이 없었던 겁니다.
    정인지가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여러분, 먼저 선생을 양성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디 누구를 선생으로 삼을까요?"
    신숙주가 제안했습니다.
    "대감, 신이 생각하옵건디, 관아의 아전들을 먼저 교육시키면 어떠하옵니까? 아전들은 백성들과 가장 가까이 있고, 또 글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옵니다."
    "오, 좋은 생각이로다!"
    실록 세종 29년 9월 조에 보면, 한성부와 각 관청의 아전 200명을 선발해서 정음청에서 교육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교육 기간은 한 달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모여서, 오시(午時, 낮 11시-오후 1시)까지 공부했어요.
    첫 수업 날, 박팽년이 200명의 아전들 앞에 섰습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한 달 동안 훈민정음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어려울 것 같지요? 아닙니다! 하루면 읽을 수 있고, 사흘이면 쓸 수 있습니다!"
    아전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정말입니까? 한문은 10년을 배워도 어려운디..."
    "보십시오!"
    박팽년이 큰 나무판에 한글 자모를 써서 걸었습니다.
    "이것이 훈민정음 28자입니다. 초성 17자, 중성 11자입니다. 이것만 외우면 끝입니다!"
    아전들이 따라 읽기 시작했습니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정말로 하루 만에 대부분의 아전들이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이틀째 되는 날, 성삼문이 가르쳤습니다.
    "자, 이제 글자를 조합해봅시다. '하늘 천' 자를 써봅시다. ㅊ, ㅓ, ㄴ... 천!"
    사흘째, 아전들이 자기 이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김첨지옵니다!"
    "저는 이방이옵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간단한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
    "오늘 날이 맑다."
    "임금님 만세!"
    보름이 지나자, 용비어천가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동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한 달 후, 시험을 봤습니다. 200명 중 195명이 합격했어요. 불합격한 5명도 읽기는 할 수 있었는데, 쓰기가 좀 서툴렀을 뿐이었습니다.
    정인지가 감격해서 세종께 보고했습니다.
    "전하, 대성공이옵니다! 아전들이 모두 훈민정음을 익혔사옵니다!"
    세종께서 기뻐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좋도다! 이제 이 아전들을 각 관청으로 보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라!"
    이렇게 해서 훈련받은 아전 200명이 각 관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자기 관청의 동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한성부의 김 아전은 매일 저녁 동료 아전 10명을 모아서 가르쳤습니다.
    "자, 오늘은 받침을 배워봅시다. ㄱ, ㄴ, ㄷ..."
    호조의 이 아전은 주말마다 장터에서 상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이 글자를 알면 장부를 쓸 수 있습니다!"
    형조의 박 아전은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까지 가르쳤습니다.
    "너희들도 이 글자를 알면, 억울한 일을 글로 쓸 수 있다!"
    실록 세종 30년 3월 조를 보면, 한성부 내 아전 1,000명이 훈민정음을 익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불과 6개월 만에 10배로 늘어난 거지요!
    또한 궁녀 교육도 확대되었습니다. 처음 50명으로 시작했던 게, 300명으로 늘어났어요. 궁녀들은 한글을 배운 후, 왕실 여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세자빈 마마께서도 한글을 배우셨고, 공주님들도 배우셨습니다. 왕실 여성들이 한글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 거지요.
    어느 날 세종께서 세자빈이 쓴 한글 편지를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이제야... 이제야 여인네들도 자기 생각을 글로 쓸 수 있게 되었구나..."

    ※ 전국 보급 작전

    세종 30년, 드디어 전국 보급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한양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이제 팔도 전체로 확대하는 거지요.
    세종께서 의정부와 정음청 대신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짐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한양 백성만을 위함이 아니라, 팔도 모든 백성을 위함이로다. 이제 전국에 퍼뜨려야 하겠으니, 묘안을 내어보라."
    영의정 황희가 아뢰었습니다.
    "전하, 신이 생각하옵건디, 각 도의 관찰사에게 명을 내리시어, 도내 각 고을에 언문 교육을 실시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좋은 생각이로다. 어떻게 실시하면 좋겠는가?"
    정인지가 나서서 아뢰었습니다.
    "전하, 신이 계획을 세웠사옵니다. 먼저 각 도에서 총명한 아전 10명씩을 뽑아 한양으로 보내옵니다. 정음청에서 한 달간 교육한 후,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교육을 확산시키는 것이옵니다."
    "그리하라!"
    실록 세종 30년 5월 조에 보면, 팔도에서 선발된 아전 80명이 한양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경기도 10명, 충청도 10명, 전라도 10명, 경상도 10명, 강원도 10명, 황해도 10명, 평안도 10명, 함경도 10명.
    정음청은 이들을 위해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단순히 한글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것인가까지 교육한 거지요.
    신숙주가 첫 날 훈시했습니다.
    "여러분은 단순한 학생이 아닙니다. 선생의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고향에 돌아가서 수백, 수천 명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육 내용은 체계적이었습니다.
    첫째 주: 한글 자모 익히기와 읽기
    둘째 주: 쓰기와 받침 사용법
    셋째 주: 용비어천가 읽기와 해석
    넷째 주: 교수법 훈련
    넷째 주 교수법 훈련이 특히 중요했습니다. 박팽년이 직접 가르쳤어요.
    "여러분, 사람들을 가르칠 때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먼저 쉬운 것부터 시작하세요. ㄱ, ㄴ, ㄷ을 먼저 가르치고, 그 다음에 조합을 가르치는 겁니다."
    "그리고 절대로 때리지 마세요! 한문 서당처럼 회초리로 때리면 안 됩니다. 훈민정음은 쉬운 글자입니다. 칭찬하면서 가르치면 누구나 배울 수 있습니다!"
    실습도 했습니다. 아전들끼리 짝을 지어서, 한 명은 선생 역할, 한 명은 학생 역할을 하면서 연습했어요.
    "자, ㄱ 소리를 내봅시다. ㄱ, ㄱ, ㄱ..."
    "잘했습니다! 이제 ㅏ를 배워봅시다!"
    한 달 후, 80명의 아전들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각자 용비어천가 10권, 월인천강지곡 5권, 교재용 나무판 2개를 받아서 말이지요.
    전라도 전주로 돌아간 김 아전은 곧바로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전주부 아전 50명을 모아서 가르쳤어요.
    "여러분, 한양에서 새로운 학문을 배워왔습니다!"
    보름 만에 50명이 한글을 익혔습니다. 그 50명이 다시 각자 10명씩을 가르쳤어요. 한 달 만에 전주부에서 500명이 한글을 배웠습니다!
    경상도 안동으로 간 이 아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안동 장터에서 공개 수업을 열었어요.
    "누구나 오십시오! 공짜로 가르쳐드립니다!"
    처음에는 10명이 왔습니다. 근디 소문이 나면서 50명, 100명으로 늘어났어요.
    강원도 원주로 간 박 아전은 특별한 방법을 썼습니다. 절에 가서 스님들을 가르친 거지요.
    "스님, 이 글자를 배우시면 불경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스님들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월인천강지곡을 보여주니까,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이게... 석가모니 부처님 이야기를... 우리말로?"
    스님들이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들이 다시 신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 백성들의 변화

    세종 31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직접 한글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겁니다!
    실록 세종 31년 3월 조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전라도 나주에 사는 백성 김순이가 언문으로 된 상소를 올리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평민 여성이 처음으로 왕께 직접 글을 올린 겁니다!
    김순이의 상소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소녀 김순이 아뢰옵니다. 저의 남편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사옵니다. 남편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사옵니다. 제발 다시 살펴주소서."
    한문을 몰랐던 김순이가, 한글을 배워서 직접 억울함을 호소한 겁니다. 세종께서 이 상소를 보시고 감격하셨다고 해요.
    "이것이로다! 이것이 내가 원했던 것이로다!"
    세종께서 즉시 형조에 명하여 김순이 남편의 사건을 재조사하게 하셨습니다. 조사 결과, 정말로 억울한 누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어요. 남편은 석방되었고, 김순이는 상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전국에 퍼지자, 백성들이 한글을 배우려는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우리도 억울한 일 있으면 임금님께 직접 말씀드릴 수 있구나!"
    경상도 상주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마을 촌장이 한글로 장부를 쓰기 시작한 거예요.
    "올해 쌀 수확: 백 석
    세금: 이십 석
    남은 것: 팔십 석"
    한문으로 쓰면 복잡했던 장부가, 한글로 쓰니까 간단명료해진 겁니다. 마을 백성들도 이제 장부를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아, 우리가 낸 세금이 이만큼이구나!"
    "올해는 풍년이라 남는 게 많네!"
    투명성이 높아진 거지요. 관리들이 함부로 속이기 어려워졌습니다.
    한양 저잣거리에서는 더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장사치들이 한글로 간판을 만들기 시작한 거예요.
    "쌀 팝니다"
    "생선 새로 들어왔어요"
    "맛있는 떡"
    한문 간판은 양반들만 알아볼 수 있었는데, 한글 간판은 누구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장사가 더 잘 되기 시작한 거지요!
    편지 문화도 생겨났습니다. 실록을 보면, 세종 32년경부터 백성들 사이에 편지 왕래가 늘어났다는 기록이 있어요.
    한 어머니가 먼 곳에 장사 간 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아가야, 어미는 잘 있다. 너도 건강히 지내거라. 빨리 돌아오너라."
    아들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저 곧 돌아가겠습니다. 돈 많이 벌었어요."
    이런 편지들을 대신 써주는 '대서소'도 생겼습니다. 아직 한글을 못 배운 사람들을 위해서, 돈을 받고 대신 써주는 가게였어요.
    "어르신, 편지 쓰시게요? 한 장에 엽전 10개입니다!"
    "허허, 고맙네. 우리 손주한테 편지 좀 써주게."
    불경도 한글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월인천강지곡 외에도, 금강경, 법화경 등이 한글로 번역되어 보급되었어요.
    절에 가면 스님이 한글로 된 불경을 읽어주는 겁니다. 신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아, 부처님 말씀이 이런 뜻이었구나!"
    "이제야 불경을 이해하겠네!"
    의학 서적도 번역되었습니다. '구급간이방'이라는 응급 의학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퍼졌어요.
    "배 아플 때는 이렇게..."
    "열 날 때는 이 약초를..."
    백성들이 스스로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세종 32년 9월, 정인지가 세종께 보고했습니다.
    "전하, 신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한양에서는 백성 10명 중 3명이 언문을 읽을 줄 압니다. 지방도 10명 중 1명은 읽을 줄 압니다!"
    세종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좋도다! 근디 아직 부족하구나. 10명 중 10명이 모두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쉬지 말고 노력해야 하느니라!"

    ※ 세종의 유지

    세종 32년 2월, 세종대왕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과로하신 탓에, 눈병과 당뇨로 고생하셨던 거지요.
    어느 날, 세종께서 정음청 대신들을 침전으로 부르셨습니다.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이 모였어요.
    세종께서 침상에 기대어 앉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경들... 짐의 몸이 예전 같지 않구나..."
    "전하, 옥체를 돌보셔야 하옵니다!"
    "아니다. 짐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짐이 알고 있노라. 그래서 경들을 불렀느니라."
    세종께서 기침을 하시고는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훈민정음... 이것만은 반드시 지켜야 하느니라. 짐이 죽은 후에도, 백성들에게 계속 가르쳐야 하느니라."
    정인지가 눈물을 훔치며 아뢰었습니다.
    "전하, 신들이 목숨을 다해 지키겠사옵니다!"
    "고맙다. 경들을 믿는다. 근디 한 가지 더 부탁이 있노라."
    "분부하옵소서."
    세종께서 침상 옆 상자를 가리키셨습니다.
    "저 안에 짐이 직접 쓴 글이 있느니라. 훈민정음 보급에 관한 유지로다. 경들이 읽어보고, 꼭 실행해주기 바라노라."
    신숙주가 상자를 열었습니다. 안에는 세종께서 한글로 직접 쓰신 글이 있었어요.
    "내 백성을 위하여 이 글자를 만들었노라. 양반도 상놈도, 남자도 여자도, 늙은이도 젊은이도, 모두가 이 글자를 쓸 수 있어야 하노라. 누구도 이를 막아서는 안 되느니라. 이는 내 유언이노라."
    대신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종 32년 2월 17일, 세종대왕께서 승하하셨습니다. 향년 54세였습니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습니다. 특히 한글을 배웠던 백성들의 슬픔이 컸어요.
    전라도 나주의 김순이는 한글로 제문을 썼습니다.
    "임금님, 소녀에게 글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한양 저잣거리 백성들도 한글로 방을 써서 대궐 앞에 붙였습니다.
    "우리 임금님, 고맙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문종이 즉위하셨습니다. 문종은 세종의 아들로, 한글 창제에도 참여하셨던 분이지요.
    문종 즉위 후 첫 조치가 무엇이었을까요? 정음청을 확대 개편하신 겁니다.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훈민정음 보급을 더욱 확대하겠노라!"
    실록 문종 1년 3월 조에 보면, 정음청 인원을 두 배로 늘리고, 예산도 증액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각 도에 '언문청'이라는 지방 기관을 만들었어요. 각 도마다 한글 보급을 전담하는 기관을 둔 겁니다.
    경상도 언문청, 전라도 언문청, 충청도 언문청... 팔도에 모두 설치되었습니다.
    문종 2년, 전국적인 한글 능력 시험이 실시되었습니다. 관아 아전들은 반드시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어야 했어요.
    "한글을 못하면 아전이 될 수 없다!"
    이는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한문만 중시하던 시대에, 한글이 공식 자격 요건이 된 거니까요.
    세종 승하 후 10년이 지난 단종 2년, 놀라운 통계가 나왔습니다.
    한양 인구의 50%가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전국적으로는 20%가 한글을 익혔다는 겁니다!
    당시 조선 인구가 약 700만 명이었으니, 140만 명이 한글을 아는 거였어요. 불과 15년 만에 이룬 기적이었습니다!
    물론 그 후 조선 역사에서 한글이 탄압받은 시기도 있었습니다. 연산군 때는 한글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고, 일부 유학자들은 계속 반대했어요.
    근디 한 번 피어난 한글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계속 썼거든요. 편지도 쓰고, 장부도 쓰고, 소설도 쓰고...
    특히 여성들이 한글을 지켰습니다. 양반 부인들이 한글로 편지를 쓰고, 한글 소설을 읽고, 자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어요.
    그렇게 한글은 500년을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세종께서 만드시고, 정음청이 퍼뜨리고, 백성들이 지켜낸 우리 글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한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세종대왕과 정음청 학자들, 그리고 한글을 배우고 사용한 수많은 조상들 덕분입니다.
    여러분, 오늘 한글로 문자 메시지 보내실 때, 한글로 검색하실 때, 잠깐이라도 생각해주세요. 이 글자를 만들고 퍼뜨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는지를 말이지요.
    한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닙니다. 백성을 사랑한 임금의 마음이고, 학자들의 헌신이고, 백성들의 열망이 담긴 우리의 자랑입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 정음청 이야기 어떠셨습니까? 한글을 만드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걸 온 백성에게 퍼뜨린 것은 더 대단한 일이었지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 그리고 한글을 배운 수많은 백성들... 모두가 힘을 합쳐서 이룬 기적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 당연하게 여기지 마시고 감사하게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세종대왕의 과학 정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측우기, 해시계, 천문 관측... 조선이 얼마나 과학적인 나라였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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