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반응형

    15편: 과학 기술, 조선의 르네상스 - 세종시대 과학 혁신

    태그 (20개)

    #세종대왕, #장영실, #조선시대과학, #한국역사, #측우기, #천문대, #앙부일구, #자격루, #조선왕조실록, #과학혁신, #세종시대, #발명품, #천문학, #농업기술, #한국의과학자, #역사드라마, #시니어교육, #르네상스, #조선의발명, #한글창제
    세종대왕, 장영실, 조선시대과학, 한국역사, 측우기, 천문대, 앙부일구, 자격루, 조선왕조실록, 과학혁신, 세종시대, 발명품, 천문학, 농업기술, 한국의과학자, 역사드라마, 시니어교육, 르네상스, 조선의발명, 한글창제

     

    후킹멘트 (400자)

    "여러분, 600년 전 조선시대에 이미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세계 최초로 빗물의 양을 재는 측우기가 우리나라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오늘날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글만이 아닙니다. 세종대왕 시대는 과학과 기술이 꽃피운 조선의 황금기였습니다. 천민 출신이었던 장영실은 세종대왕의 믿음 속에서 세계적인 과학자로 성장했고, 수많은 발명품으로 백성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유럽의 르네상스보다 앞선 조선의 과학 혁명, 오늘은 그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와 창의력을 함께 만나보시죠."

    디스크립션 (300자)

    "세종대왕 시대는 단순히 한글을 창제한 시기만이 아니었습니다. 과학, 천문, 농업, 의학 등 모든 분야에서 혁신이 일어난 조선의 르네상스였습니다. 특히 천민 출신 장영실의 성공 스토리는 신분을 뛰어넘는 능력주의의 표본이었지요. 자격루, 앙부일구, 측우기 등 세계적인 발명품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백성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우리 역사 속 과학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긍심을 느껴보세요."

    ※ 천민 장영실과 세종의 운명적 만남

    세종 6년, 1424년 봄이었습니다. 한양 궁궐 안 상의원에서는 신하들이 모여 격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하교를 내리셨기 때문이었지요.
    "동래 관노 장영실을 궁중으로 불러 올리라 하셨다? 천민을 어찌 궁궐로 불러들이신단 말인가!"
    황희 정승을 비롯한 신하들은 당황했습니다.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니까요. 양반과 상민, 그리고 천민의 구분이 명확했고, 특히 노비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경들은 신분만 보는구나. 짐은 그 사람의 재능을 보고자 한다."
    세종은 이미 장영실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동래 관청의 노비였지만, 손재주가 뛰어나 각종 기물을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소문이었지요. 특히 물레방아를 개량하여 관개 시설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신분이 낮다고 재능까지 낮은 것은 아니다. 만약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라의 큰 손실이 아니겠는가."
    세종의 뜻이 확고하자 신하들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며칠 후, 장영실이 한양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평생을 노비로 살아온 그에게 궁궐은 꿈만 같은 곳이었습니다.
    "천민 장영실, 전하를 뵙습니다!"
    장영실이 엎드려 절을 올리자, 세종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고개를 들어 짐을 보거라."
    장영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습니다. 세종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어요. 거칠게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총명하고 영특해 보였습니다.
    "네가 바로 물레방아를 고쳐 만들었다는 장영실이냐?"
    "예, 전하. 소인이옵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전하, 소인은 관청에서 물레방아를 관리하는 일을 했사옵니다. 해마다 가뭄이 들면 백성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보았고, 물을 끌어올리는 일이 너무 힘든 것을 보았사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쉽게 물을 끌어올릴 방법을 궁리하다가... 물레방아의 날개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 보았더니 물이 더 잘 올라오더이다."
    세종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론이나 책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직접 해결책을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네게 묻겠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관측하여 정확한 시간을 아는 것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
    장영실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전하, 농사는 때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망치옵니다. 정확한 시간을 알아야 씨 뿌릴 때를 알고, 추수할 때를 알 수 있사옵니다. 또한 관청에서 일할 때도 시간을 정확히 알아야 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지옵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세종은 무릎을 쳤습니다. 장영실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었습니다. 왜 그것이 필요한지, 백성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이었어요.
    "장영실, 짐이 네게 중대한 임무를 맡기려 한다. 명나라에서는 물시계를 사용하여 시간을 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개량하고, 더 나아가 백성들도 쉽게 시간을 알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네가 해낼 수 있겠느냐?"
    장영실은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천민인 자신에게 이런 중대한 임무를 맡기다니! 그는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전하, 소인이 비록 천한 신분이오나, 목숨을 다하여 전하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
    세종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파격적인 명을 내렸습니다.
    "장영실에게 종6품 벼슬을 내리고, 궁궐 내 별공장에서 일하게 하라. 그리고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
    신하들은 경악했습니다. 노비에게 벼슬을 내리다니! 하지만 세종의 결정은 확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과 성군 세종대왕의 운명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신분을 뛰어넘은 이 만남은 곧 조선의 과학 혁명을 이끌게 됩니다.

    ※ 스스로 시간을 알리는 물시계

    세종대왕의 명을 받은 장영실은 곧바로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물시계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어요.
    "대감, 이 명나라 물시계의 구조를 보십시오. 물이 일정하게 흐르게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시간이 되면 사람이 직접 종이나 북을 쳐야 합니다."
    장영실은 세종에게 문제점을 보고했습니다. 당시 중국의 물시계는 물이 차는 것으로 시간을 재는 원리였지만, 시간을 알리는 것은 사람이 직접 해야 했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전하, 소신은 물의 힘으로 스스로 시간을 알리는 장치를 만들고자 하옵니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동으로 시간을 알린다면, 더욱 정확하지 않겠사옵니까?"
    세종은 눈을 반짝였습니다.
    "스스로 시간을 알린다... 자동으로 말이냐?"
    "예, 전하. 물이 차면 그 무게로 장치가 움직이게 하고, 그 힘으로 인형이 종과 북과 징을 치게 만들 수 있사옵니다."
    "허허, 신기하구나!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소신이 한번 도전해보겠사옵니다!"
    장영실은 궁궐 한쪽에 마련된 작업장에서 밤낮으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요. 물이 일정하게 흐르지 않으면 시간이 부정확해졌고,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인형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안 돼... 이렇게 하면 물의 압력이 일정하지 않아..."
    장영실은 며칠 밤을 새우며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렇지! 물통을 두 개로 나누어, 한쪽에서는 일정하게 물을 흘려보내고, 다른 쪽에서는 그것을 받아 무게를 재면 되는 거야!"
    장영실은 곧바로 설계도를 수정했습니다. 파수호라는 물통에서 물이 일정하게 흘러나와 수수호라는 다른 물통에 차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수수호 안에는 부표라는 떠다니는 장치를 넣어, 물이 차면 부표가 올라가며 자동으로 시간 알림 장치를 작동시키게 했습니다.
    드디어 세종 16년, 1434년이었습니다. 10년의 연구 끝에 자격루가 완성된 것입니다!
    "전하, 자격루가 완성되었사옵니다!"
    세종대왕을 비롯한 신하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장영실의 설명이 시작되었어요.
    "이 자격루는 스스로 시간을 재는 물시계이옵니다. 위쪽의 파수호에서 물이 일정하게 흘러내려 아래쪽 수수호에 차게 되어 있사옵니다."
    신하들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자격루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수수호 안의 부표가 물과 함께 떠오르면서, 이 막대를 밀어올립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인형들이 작동하여 시간을 알리는 것이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자격루의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종을 든 인형이 종을 쳤고, 북을 든 인형이 북을 쳤으며, 징을 든 인형이 징을 쳤습니다!
    "땡! 땡! 쿵! 쿵! 챙! 챙!"
    신하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시간을 알리다니!
    "경이롭구나!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이치를 담은 기계로다!"
    세종대왕은 크게 감탄하며 장영실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장영실, 그대의 재능은 참으로 하늘이 내린 것이로다. 이제 온 백성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게 되었구나!"
    장영실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천민으로 태어나 평생 천대받으며 살았던 그가, 이제는 임금님께 칭찬을 받는 과학자가 된 것입니다.
    자격루는 보루각이라는 건물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종소리가 울려 퍼졌지요. 한양의 백성들은 이 소리를 듣고 시간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듣게나, 보루각에서 시간을 알리는구먼!"
    "참으로 신기한 일이야. 사람 손 없이 스스로 종을 친다니!"
    자격루의 성공은 장영실에게 더 큰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많은 발명품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 앙부일구와 천문 관측

    자격루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장영실은 다음 과제에 착수했습니다. 바로 해시계를 만드는 것이었지요.
    "전하, 자격루는 훌륭하오나 한 가지 문제가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궁궐 안에서만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일반 백성들은 집에서 시간을 알 수 없사옵니다. 또한 물시계는 겨울에 얼어버리는 문제도 있사옵니다."
    세종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겠느냐?"
    "전하, 해를 이용한 시계를 만들면 어떻겠사옵니까? 해는 매일 뜨고 지며, 그림자의 길이와 방향으로 시간을 알 수 있사옵니다."
    "해시계 말이냐? 중국에도 있다고 들었는데..."
    "예, 전하. 하오나 소신은 우리 조선의 위도에 맞는, 그리고 백성들이 보기 쉬운 해시계를 만들고자 하옵니다."
    세종은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장영실은 이번에는 이천과 김빈이라는 학자들과 함께 연구에 들어갔어요.
    "여기를 보십시오. 해가 움직이는 각도를 계산하면, 그림자가 어디에 생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천이 복잡한 계산식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장영실은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대감, 이 계산이 맞기는 하오나 너무 복잡하옵니다. 백성들이 쉽게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시간을 나타내는 선을 크고 선명하게 새기고, 그릇처럼 움푹하게 만들어 그림자가 정확히 보이게 하면 어떻겠사옵니까?"
    "오! 그것 좋은 생각이로세!"
    장영실의 아이디어는 참신했습니다. 평평한 해시계가 아니라, 반구 모양의 오목한 해시계를 만든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앙부일구였습니다.
    세종 20년, 1438년에 앙부일구가 완성되었습니다. 반구 형태의 시계판에는 13개의 시간선이 새겨져 있었고, 가운데 세워진 영침이 그림자를 만들었어요.
    "전하, 앙부일구가 완성되었사옵니다!"
    세종대왕이 직접 나와 앙부일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릇처럼 생긴 앙부일구는 보기에도 아름다웠고, 시간을 읽기도 쉬웠습니다.
    "훌륭하구나! 이제 백성들도 쉽게 시간을 알 수 있겠구나!"
    세종은 명을 내려 종묘 앞, 혜정교, 종루 등 한양 곳곳에 앙부일구를 설치하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신기해하며 앙부일구를 구경했어요.
    "저것 좀 보게.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다네!"
    "참으로 신묘한 물건이로군!"
    하지만 장영실의 야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종대왕은 천문학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거든요.
    "장영실, 이번에는 하늘의 별을 관측하는 기구를 만들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전하의 뜻이라면 소신이 온 힘을 다하겠사옵니다!"
    세종은 서운관이라는 천문 기관을 강화하고, 천문 관측을 위한 여러 기구를 만들게 했습니다. 장영실은 간의, 혼천의, 혼상 같은 천문 기구들을 제작했어요.
    간의는 별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는 기구였습니다. 여러 개의 고리가 겹쳐진 구조로, 별의 고도와 방위를 잴 수 있었지요.
    혼천의는 하늘의 운행을 보여주는 기구였습니다. 둥근 구 모양으로 만들어져, 별자리와 천체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어요.
    혼상은 천문도를 입체적으로 만든 것으로, 밤하늘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경이롭구나! 이제 우리 조선도 천문학에서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겠구나!"
    세종은 이런 천문 기구들을 이용해 별을 관측하고, 달력을 만들고, 농사에 필요한 절기를 정확히 계산했습니다.
    세종 23년, 1441년에는 경복궁 안에 간의대라는 천문대를 세웠습니다. 높은 돌로 쌓아 올린 이 천문대에서 밤마다 하늘을 관측했지요.
    "장영실, 그대 덕분에 우리나라가 천문학의 강국이 되었도다!"
    장영실은 깊이 절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더 만들고 싶은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

    세종 23년, 1441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전국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올해도 경상도에는 가뭄이 들었고, 전라도에는 큰비가 내렸다 하니... 백성들의 고통이 크겠구나."
    조선은 농업 국가였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문제, 비가 오지 않아도 문제였지요.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비가 왔는지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전하,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보고가 제각각이옵니다. 어떤 곳은 '큰비가 왔다' 하고, 어떤 곳은 '적은 비가 왔다' 하니, 정확한 상황을 알 수가 없사옵니다."
    영의정 황희가 아뢰었습니다. 세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영실을 불렀습니다.
    "장영실, 비의 양을 정확히 재는 방법이 없겠느냐?"
    "비의 양을... 잰다고요?"
    "그렇다. 각 고을마다 똑같은 그릇을 두고, 비가 얼마나 왔는지 재면 어떻겠느냐? 그러면 어느 곳에 가뭄이 심한지, 어느 곳에 홍수가 날 위험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장영실은 무릎을 쳤습니다.
    "전하의 혜안이 참으로 놀랍사옵니다! 소신이 그런 기구를 만들어보겠사옵니다!"
    장영실은 곧바로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원리는 간단했지만, 정확성이 중요했어요.
    "일정한 크기의 그릇을 만들고, 비가 얼마나 차는지를 재면 되는 거야. 하지만 그릇이 너무 크면 측정하기 어렵고, 너무 작으면 정확하지 않아..."
    장영실은 여러 가지 크기로 실험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적절한 크기를 찾아냈어요.
    "높이 1척 5촌, 지름 7촌의 원통형 그릇이 가장 좋겠습니다!"
    세종 23년 8월, 드디어 측우기가 완성되었습니다. 쇠로 만든 원통 모양의 그릇이었지요.
    "전하, 이 측우기를 각 고을의 관아 마당에 설치하고, 비가 온 뒤에 자로 물의 깊이를 재면 정확한 강우량을 알 수 있사옵니다!"
    세종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훌륭하다! 이제 전국의 비 내린 양을 정확히 비교할 수 있겠구나!"
    세종은 즉시 명을 내렸습니다.
    "전국 각 고을에 측우기를 설치하라! 그리고 비가 오면 반드시 측정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이것은 세계 최초의 공식적인 강우량 측정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측우기가 만들어진 것이 200년 이상 지난 후였으니, 조선의 과학 기술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 알 수 있지요.
    측우기의 도입으로 조선의 농업 정책은 혁명적으로 변했습니다.
    "전하, 올해 경상도의 강우량이 예년의 절반에 불과하옵니다. 가뭄 대책을 세워야 하옵니다."
    "좋다. 즉시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라!"
    "전하, 전라도 지역의 강우량이 예년보다 두 배나 많사옵니다. 홍수에 대비해야 하옵니다."
    "제방을 점검하고, 물을 빼낼 수로를 정비하라!"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정책 덕분에 백성들의 피해가 크게 줄었습니다.
    어느 날, 한 농부가 관아를 찾아왔습니다.
    "나으리, 이번에 미리 곡식을 나누어주신 덕분에 목숨을 구했사옵니다. 측우기라는 신기한 기구로 가뭄을 미리 알았다 하니, 전하와 만드신 분께 정말 감사하옵니다!"
    이런 이야기가 세종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세종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어요.
    "이것이 바로 과학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로다. 장영실, 그대의 공이 크도다!"
    측우기는 조선 시대 내내 사용되었습니다. 무려 500년 가까이 한반도의 강우량을 기록한 것이지요. 이런 장기간의 기상 데이터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 농사직설과 농업 혁명

    세종대왕의 과학 진흥 정책은 천문과 기계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생활과 직결된 농업 기술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지요.
    세종 11년, 1429년의 일이었습니다. 세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경들, 우리 백성의 대부분은 농사를 짓고 살아간다. 그런데 농사법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아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중국의 농서들은 중국 땅에 맞는 방법이라 우리나라에서는 맞지 않는 것들이 많다."
    "전하의 말씀이 지당하시옵니다."
    "짐은 우리 땅에 맞는, 우리 백성을 위한 농서를 만들고자 한다. 정초, 변효문을 비롯한 학자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농부들의 경험을 모으고, 우리 땅에서 실제로 효과가 있는 농사법을 기록하라!"
    세종의 명을 받은 학자들은 전국 팔도를 누볐습니다. 양반 학자들이 직접 농부들을 찾아가 농사법을 물었지요.
    "노인장, 이 지역에서는 벼를 어떻게 심으시오?"
    "우리 마을에서는 이렇게 하오. 모를 너무 깊이 심으면 안 되고, 이만큼 간격을 두어야 하오."
    "고추는 언제 심는 것이 좋소?"
    "이 땅에서는 곡우 지나고 보름쯤 지나 심어야 잘 자라오."
    학자들은 노트에 부지런히 기록했습니다. 경험 많은 농부들의 지혜가 하나하나 모아졌어요.
    남쪽 지방에서는 따뜻한 기후에 맞는 농사법이, 북쪽 지방에서는 추운 날씨에 맞는 방법이 수집되었습니다. 산간 지방의 밭농사, 평야 지역의 논농사, 해안 지역의 특수한 재배법들이 모두 조사되었지요.
    몇 년간의 작업 끝에 세종 11년, 마침내 '농사직설'이라는 책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농서였어요.
    "전하, 농사직설이 완성되었사옵니다!"
    세종은 직접 책을 펼쳐보았습니다. 한자와 함께 한글로도 쓰여 있어서 글을 모르는 농부들도 읽을 수 있게 되어 있었어요.
    "좋다! 이 책을 인쇄하여 전국의 각 고을에 나누어주라. 그리고 관리들은 백성들에게 이 농사법을 가르치도록 하라!"
    농사직설에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가득했습니다.
    "벼농사는 이렇게 하라. 모내기는 5월 중순이 좋고, 모의 간격은 한 뼘 정도 띄워라."
    "밭농사는 땅을 깊이 갈고, 거름을 충분히 주어라. 콩은 이랑을 만들어 심고, 김매기는 세 번 하라."
    "감자는 봄에 심어 가을에 거두되, 물이 잘 빠지는 곳에 심어라."
    농사직설은 단순히 이론만 적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농부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에 매우 실용적이었지요.
    전국에 농사직설이 보급되자 농업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 책대로 하니까 정말 수확이 늘어났소!"
    "작년보다 곡식이 두 배나 더 났구먼!"
    농부들은 기뻐했습니다. 세종의 과학 정책은 단순히 학문의 발전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실생활을 개선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세종은 농업 기술자들을 육성했습니다. 각 고을마다 농사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을 두어, 새로운 농법을 보급하게 했지요.
    "올해부터는 밭을 돌려가며 농사짓는 윤작법을 해보십시오. 같은 땅에 계속 같은 작물을 심으면 땅이 척박해지지만, 돌려가며 심으면 땅의 힘이 유지됩니다."
    세종 시대에는 수리 시설도 대폭 확충되었습니다. 전국에 저수지를 만들고, 물길을 정비하여 가뭄에 대비했어요.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임금의 첫 번째 책임이로다!"
    세종의 이런 노력 덕분에 조선의 농업은 크게 발전했고,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되었습니다.

    ※ 의학 발전과 향약집성방

    세종대왕의 과학 진흥은 의학 분야에도 미쳤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약재를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어요.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중국 약재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은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지요.
    세종 15년, 1433년의 일이었습니다.
    "전하, 올해도 역병이 돌아 많은 백성이 죽어가고 있사옵니다."
    "약은 충분히 있느냐?"
    "그것이... 중국에서 들여오는 약재가 부족하여 귀한 약을 구하기가 어렵사옵니다."
    세종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우리 땅에도 약초가 많지 않은가? 우리 산과 들에서 나는 약초로 백성을 치료할 수는 없겠는가?"
    "전하, 그것은 향약이라 하여 민간에서 사용하기는 하나, 제대로 정리된 의서가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우리 땅의 약초를 조사하여 의서를 만들어야겠구나!"
    세종은 유효통, 노중례, 박윤덕 등 의관들을 불러 명을 내렸습니다.
    "경들은 전국의 향약을 조사하고, 그 효능을 시험하여 의서를 편찬하라. 우리 백성들이 우리 땅의 약초로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하라!"
    의관들은 전국을 돌며 약초를 채집했습니다. 산과 들, 강가와 바닷가를 샅샅이 뒤졌지요.
    "이 풀은 무엇에 쓰는 것이오?"
    "이것은 더위를 먹었을 때 달여 먹으면 좋사옵니다."
    "이 뿌리는요?"
    "배가 아플 때 쓰는 것이옵니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약초 지식들이 하나하나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환자들에게 사용해보며 효과를 검증했어요.
    10여 년의 작업 끝에 세종 15년, '향약집성방'이라는 방대한 의서가 완성되었습니다. 무려 85권에 달하는 이 책에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초 1,400여 종과 치료법 1만여 가지가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전하, 향약집성방이 완성되었사옵니다!"
    세종은 두꺼운 책을 넘기며 감탄했습니다.
    "참으로 방대하구나! 이제 우리 백성들은 비싼 중국 약재가 아니라 우리 산천의 약초로 병을 고칠 수 있겠구나!"
    향약집성방에는 구체적인 처방들이 가득했습니다.
    "감기에는 생강과 대추를 달여 마시고, 기침에는 도라지 뿌리를 쓰라."
    "두통에는 국화꽃을 달이고, 소화불량에는 산사나무 열매를 쓰라."
    "상처가 났을 때는 질경이 잎을 찧어 붙이고, 화상에는 감자를 갈아 바르라."
    이 의서는 전국의 관청과 의원들에게 보급되었습니다. 의원들은 이제 비싼 수입 약재 대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로 백성들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의원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이의 열이 내렸습니다."
    "다행이구려. 이 약초는 뒷산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니, 다음에 또 필요하면 직접 캐서 쓰시게."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종 25년에는 '의방유취'라는 더 큰 의서 편찬을 시작했어요. 이것은 당시까지의 모든 의학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사전 같은 책이었습니다.
    무려 365권에 달하는 의방유취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 이론, 각종 질병의 치료법, 약재의 효능 등이 빠짐없이 수록되었습니다.
    또한 세종은 의학 교육에도 힘썼습니다. 전의감이라는 의학 교육 기관을 강화하고, 더 많은 의원을 양성했지요.
    "의술은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이니, 의원은 학식과 덕을 겸비해야 한다!"
    세종의 노력으로 조선의 의학 수준은 크게 높아졌습니다. 백성들의 건강도 좋아졌고, 평균 수명도 늘어났어요.

    ※ 세종시대 과학의 유산

    세종 32년, 1450년 2월. 세종대왕의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평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결과,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어요.
    침상에 누운 세종은 신하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장영실도 그 자리에 있었지요.
    "경들, 짐이 재위한 지 32년이 되었구나. 그동안 우리가 이룬 것들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구나."
    "전하..."
    신하들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하였고, 과학 기구들을 만들어 농사와 천문을 발전시켰구나. 의학을 발전시켜 백성들의 건강을 돌보았고, 음악과 예술도 꽃피웠도다."
    세종은 장영실을 바라보았습니다.
    "장영실, 그대는 천민으로 태어났지만 재능으로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되었도다. 그대가 만든 자격루, 앙부일구, 측우기는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느니라."
    장영실은 눈물을 흘리며 절을 올렸습니다.
    "전하의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하겠사옵니다. 천민이었던 소신에게 기회를 주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신 은혜..."
    "아니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노력이었느니라. 짐은 다만 기회를 준 것뿐이다."
    세종은 모든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경들, 부디 이 정신을 이어받아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계속하여 주게. 과학과 기술은 단순히 신기한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 것임을 잊지 말게."
    그해 2월 17일, 세종대왕은 54세를 일기로 승하하셨습니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지요.
    하지만 세종이 남긴 유산은 조선 역사 내내 이어졌습니다.
    자격루와 앙부일구는 조선 시대 내내 사용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이 기구들로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었고, 농사 시기를 놓치지 않았어요.
    측우기는 500년 가까이 사용되며 귀중한 기상 데이터를 남겼습니다. 이런 장기간의 강우량 기록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과학적 유산이 되었지요.
    농사직설은 계속 보완되고 발전하여 조선 후기까지 농업의 교과서 역할을 했습니다. 덕분에 조선의 농업 생산성은 꾸준히 향상되었어요.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는 조선 의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많은 의원들이 이 책으로 공부하고, 백성들을 치료했지요.
    장영실의 제자들은 스승의 정신을 이어받아 계속해서 새로운 기구들을 개발했습니다. 세종 이후에도 조선의 과학 기술은 발전을 거듭했어요.
    특히 중요한 것은 세종이 보여준 인재 등용의 정신이었습니다.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조선이 과학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지요.
    "전하께서는 신분이 아니라 재능을 보셨다. 그 정신을 우리도 이어가야 한다."
    후대의 임금들도 세종의 정신을 본받으려 노력했습니다.
    지금도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과학자의 이야기, 백성을 사랑한 임금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한 교훈을 줍니다.
    현대 한국이 과학 기술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600년 전 세종시대에 뿌려진 씨앗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과학을 중시하고, 실용을 추구하며, 인재를 존중하는 정신. 그것이 바로 세종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입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은 세종시대의 과학 혁명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6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뛰어난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지 놀랍지 않으신가요?
    특히 감동적인 것은 장영실의 이야기입니다. 노비 출신이었지만 재능을 인정받아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되었죠. 이것은 세종대왕의 열린 마음과 능력주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세종시대는 단순히 한글만 만든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과학, 천문학, 농업, 의학 등 모든 분야에서 혁신이 일어난 조선의 르네상스였습니다. 유럽보다 200년이나 앞서 측우기를 발명했고, 자동 물시계를 만들었으며, 실용적인 농업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이런 과학 기술들은 단순히 신기한 발명품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정확한 시간 측정으로 농사를 돕고, 강우량 측정으로 재해를 예방하며, 우리 약초로 백성을 치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세종이 추구한 애민정신이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과학 기술 강국이 된 것도 이런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세종시대의 정신을 이어받아 계속 발전해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이야기가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다음 편에서는 조선의 또 다른 놀라운 역사를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