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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편 생육신, 살아남은 충신들 – 은둔과 충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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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 멘트 (250자 이상)
여러분, 오늘은 조선 역사상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1455년, 어린 조카의 옥좌를 빼앗은 숙부 세조. 그 부당한 권력 앞에서 목숨을 던진 사육신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여섯 명의 선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지요. 미친 척, 죽은 척, 산속으로 숨어들어 평생을 떠돌며 단종을 향한 절개를 지킨 사람들. 바로 '생육신(生六臣)'입니다. 스물한 살 청년 김시습이 책을 불태우고 머리를 깎은 그날, 한 시대의 양심이 통곡했습니다. 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고, 그렇다고 헛되이 죽지도 않았던 이 기이한 충신들의 이야기. 오늘 밤, 매월당 김시습의 발자취를 따라 오백 년 전 그 슬픈 산하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끝까지 함께해 주신다면, 여러분의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실 겁니다.
※ 1: 단종 폐위 소식에 책을 불태우는 청년 김시습
때는 단종 3년, 서기 1455년 윤유월. 삼각산 중흥사 깊은 골짜기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나이는 갓 스물하나. 이름은 김시습,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던 사람이었지요. 세 살에 글을 짓고, 다섯 살에 세종대왕 앞에 불려가 시를 지어 비단 오십 필을 하사받았던 바로 그 아이입니다. 세종께서 어찌나 기특히 여기셨던지, "이 아이가 자라거든 크게 쓰리라" 하셨다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오세 김시습'이라 불렀습니다. 다섯 살에 이미 천하에 이름을 떨친 사람. 누구나 그가 장차 정승 판서가 되어 나라의 기둥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여름, 과거 공부를 한답시고 삼각산 깊은 절간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몇 해를 산속에서 책과 씨름하며, 곧 있을 과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던 참이었지요. 어머니는 일찍이 여의었고, 아버지마저 병으로 누워 계셨으니, 가문을 일으킬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도 그는 늘 환하게 웃던 청년이었답니다. 학문을 사랑하고, 술을 좋아하며, 시를 짓는 일에 미친 사람. 세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날, 한양에서 올라온 한 길손이 절 마당에 짚신을 벗으며 한숨을 푹 내쉬는 것이 아닙니까. 김시습이 무슨 일이냐 물으니, 길손이 고개를 떨구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선비님, 모르고 계셨소이까. 주상 전하께서… 상왕으로 물러나시고, 수양대군께서 보위에 오르셨소이다. 어린 임금을 그 숙부가 끌어내렸단 말이외다." 이 말을 들은 김시습은 한참을 그 자리에 굳어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지요. 사흘째 되던 밤, 절 마당에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깜짝 놀란 스님들이 달려가 보니, 김시습이 자기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책들을 모조리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지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서삼경이며, 시집이며, 손때 묻은 그 모든 서책들이 시뻘건 화염 속에서 재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지요.
스님들이 황급히 말리려 하자, 그는 미친 사람처럼 껄껄 웃으며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한 세상에, 글이 무슨 소용이며 벼슬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이 책들이 다 무엇이오! 충(忠)도 의(義)도 다 거짓말이로구나. 다 태워버려라, 다 태워버려!" 그러고는 그 길로 칼을 꺼내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잘라버렸습니다. 청년 선비의 검고 윤기 흐르던 머리가 한 줌의 잘린 풀처럼 마당에 흩어졌지요. 다음 날 새벽, 그는 누더기 같은 승복 한 벌을 걸치고 바랑 하나를 짊어진 채 절 문을 나섰습니다. 동녘 하늘이 막 붉어지고 있었답니다. 뒤에서 노승 한 분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불렀지요. "열경아, 어디로 가려느냐." 김시습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답했답니다. "구름이 가는 곳으로 가렵니다.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렵니다. 다시는… 이 더러운 세상에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시대의 천재가 미친 중이 되어, 끝없는 방랑의 길에 오르고 말았습니다.
※ 2: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 세조 2년, 1456년 유월. 한양에 무서운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된 여섯 충신이 거열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사지가 찢기고, 목이 베이고, 시신은 저잣거리 노량진 백사장에 버려졌지요. 세조의 명이 추상같았답니다. "누구든 저 역적의 시신에 손대는 자는 똑같이 삼족을 멸하리라." 그래서 며칠이 지나도록 그 여섯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었습니다. 까마귀만 울고, 비린내만 진동하는 한여름 노량진 강변.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감히 다가갈 수 없었지요.
그런데 그 새벽, 강안개를 뚫고 한 사내가 나타났습니다. 다 떨어진 누더기 승복에 삿갓을 푹 눌러쓴 거지꼴의 중. 바로 김시습이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성큼성큼 백사장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흩어진 시신들을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답니다. 이 토막난 다리는 누구의 것인고, 이 잘린 손은 누구의 것인고. 그는 통곡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지게에 시신을 실어 노량진 남쪽 언덕으로 옮겼습니다. 그곳 양지바른 곳에 일일이 구덩이를 파고, 한 분 한 분 정성껏 묻었지요. 봉분 앞에 작은 돌 하나씩을 세우고, 그 위에 손가락을 깨물어 붉은 피로 이름 석 자씩을 적었답니다. "성삼문지묘", "박팽년지묘"… 이것이 바로 오늘날 노량진 사육신묘의 시초라고 전해집니다.
그날 밤, 그는 묘 앞에 술 한 병 따라놓고, 달을 보며 이렇게 시를 읊었다지요. "이 한 몸 죽기는 쉬운 일이로되, 의(義)를 지키며 사는 일이 더 어렵구나. 그대들은 죽어 이름을 남겼으나, 나는 살아 무엇을 남길 것인고." 이 일이 알려지자 한양 사람들은 김시습을 두려워하면서도 우러러보았답니다. 어떤 이는 그를 미친 중이라 손가락질했고, 어떤 이는 진짜 충신이라 눈물지었지요. 세조도 이 소식을 들었으나, 김시습이 워낙 미친 시늉을 잘하는지라 차마 죽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길에서 정승 한태수를 만났는데, 김시습이 갑자기 길바닥에 똥을 누면서 껄껄 웃었다지 뭡니까. 또 한번은 영의정 정창손이 행차하는 앞을 가로막고 서서 "이놈, 그만하고 물러가거라!" 하고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창손은 그때 단종 폐위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지요.
그렇게 그는 미친 척, 거지 척, 술주정뱅이 척을 하며 팔도를 떠돌았습니다. 관서 지방의 묘향산, 관동 지방의 금강산, 호남의 지리산, 영남의 가야산… 그가 발길 닿지 않은 명산이 없었답니다. 가는 곳마다 시를 지어 바위에 새기고, 나무껍질에 적었지요. 어떤 농부가 밭을 갈다가 거지 같은 중을 만났는데, 하룻밤 재워주고 나니 다음 날 아침 마당 한구석에 절창의 시 한 수가 적혀 있더라는 이야기. 어떤 주막집 주모가 술 한 사발 외상으로 주었더니, 벽에다 그림 같은 글씨로 시를 써놓고 갔는데, 그게 김시습의 친필이라 나중에 천금을 받았다는 이야기. 이런 일화가 팔도 곳곳에 전설처럼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동방의 광객(狂客)', 동쪽 나라의 미친 나그네라 불렀지요. 그러나 그 미친 척하는 가슴속에 얼마나 시퍼런 칼날이 박혀 있었는지, 아는 이는 드물었답니다. 그는 한 번도 단종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디서든 보름달이 뜨면, 동쪽 영월 하늘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하지요. 거기, 어린 임금의 무덤이 있었으니까요.
※ 3: 경주 금오산에서 『금오신화』를 짓다
세월이 흘러 김시습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겼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발길을 멈춘 곳이 바로 경주 남산, 옛 신라의 도읍지였지요. 산 깊은 곳 금오산 용장사 아래, 그는 작은 초막 하나를 짓고 '매월당(梅月堂)'이라 이름 붙였답니다. 매화꽃이 달빛을 받아 빛나는 집이라는 뜻이지요. 이 매월당에서 그는 무려 일곱 해를 머물렀습니다. 평생 한곳에 가장 오래 머무른 시절이었지요. 이때 그가 지은 책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집인 『금오신화(金鰲新話)』입니다.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다섯 편의 기이한 이야기가 이 산속 초막에서 태어났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 무렵 김시습에게도 한 사람의 여인이 있었다는 야담이 전해 옵니다. 어느 봄날, 그가 경주성 안 저잣거리를 지나는데, 한 양반집 담장 너머에서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발길이 저절로 멈출 만큼 청아한 소리였지요. 담 너머를 슬쩍 엿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뜰 안에 한 여인이 가야금을 뜯고 있더랍니다. 나이는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흰 모시 적삼에 옥색 치마, 길게 땋은 머리 끝에 빨간 댕기.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여인의 눈가에 깊은 슬픔이 어려 있었답니다. 사연인즉슨, 그 댁 외동딸로 정혼한 낭군이 있었는데, 그 낭군이 사육신의 한 사람과 인척이라 하여 멸문지화를 입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것이었지요. 여인은 그 후로 시집도 가지 않고, 매일 가야금만 뜯으며 죽은 정인을 기리고 있었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시습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신과 똑같은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지요. 며칠 후 그는 그 집 사랑채에 글 동냥을 핑계로 찾아갔고, 여인의 아버지가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매월당임을 알아보고는 극진히 모셨답니다. 두 사람은 발을 사이에 두고 시를 주고받았지요. 여인이 한 구절을 읊으면, 김시습이 다음 구절을 이었습니다. 봄밤이 짧고, 살구꽃이 바람에 흩날렸지요. 어느 달 밝은 밤, 두 사람은 후원 정자에서 단둘이 마주 앉았답니다.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선비님, 저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하니, 김시습이 가만히 그 손을 잡으며 "나도 이미 십 년 전에 죽은 사람이외다. 죽은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만났으니, 이 또한 인연이 아니겠소" 하였다지요. 두 사람은 그날 밤, 살구꽃 그림자 어른거리는 정자에서 서로의 슬픔을 끌어안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짧은 봄날의 인연은 곧 끝나고 말았습니다. 김시습은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요. 또한 자신이 한 여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듬해 봄, 그는 말없이 매월당을 떠나며 여인에게 시 한 수를 남겼답니다. "꿈에 만난 인연은 꿈처럼 흩어지고, 살구꽃 진 자리에 달빛만 남았구나. 그대여 나를 잊으시오, 나는 구름을 따라가는 사람이외다." 여인은 그 시를 가슴에 품고 평생 수절하며 살았다 하지요. 훗날 그가 지은 「이생규장전」, 담장 너머로 만난 두 연인이 끝내 이루지 못하는 그 슬픈 사랑 이야기가, 어쩌면 이때의 자신의 짧은 봄날을 그린 것이 아니었을까.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짐작했답니다. 매월당의 가슴에는 임금에 대한 충절뿐 아니라, 한 여인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도 함께 묻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끝내 다시 그 경주 골목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충신의 길과 정인의 길은 끝내 함께 갈 수 없었으니까요.
※ 4: 영월 청령포 단종을 향한 원호의 눈물
자, 이제 매월당 김시습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또 한 사람의 생육신을 만나러 가보십시다. 강원도 영월 땅, 동강이 굽이굽이 흘러드는 그 깊은 산골에 청령포라는 곳이 있습니다.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이고, 한쪽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막힌 천연의 감옥. 바로 어린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유배를 온 곳이지요. 이 청령포에서 멀지 않은 강 건너편에 한 늙은 선비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원호, 호는 관란(觀瀾). 일찍이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명망 높은 학자였지요.
원호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벼슬과 가산을 정리하고 영월 서강 가에 초막 한 채를 지었답니다. 청령포가 빤히 건너다보이는 강 언덕배기였지요. 그는 매일 새벽이면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청령포 쪽을 향해 네 번 절을 올렸습니다. 임금에 대한 사배(四拜)였지요. 그리고 강가에 나가 종일 강물만 바라보았답니다. '관란(觀瀾)'이라는 그의 호가 바로 '물결을 바라본다'는 뜻이었지요. 사람들이 와서 "선비님, 이러시다 굶어 죽겠소이다" 하면,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내가 강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강물 너머 우리 임금을 보는 것이라네" 하였답니다.
그런데 청령포는 강을 건너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고, 호위 군사들이 삼엄하게 지켜 누구도 단종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원호는 어떻게든 어린 임금께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요.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냈답니다. 산에서 과일을 따고, 밭에서 채소를 거두어, 그것을 작은 함지박에 정성껏 담은 다음, 짧은 편지 한 장 곁들여 강물에 띄워 보낸 것입니다. 함지박은 강물을 따라 흘러흘러 청령포 모래밭에 가닿았지요. 단종이 그것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이 깊은 산골에 자신을 잊지 않은 신하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린 임금의 눈가가 젖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지박은 봄이 가고 여름이 오도록, 가을 단풍이 들도록 계속 흘러갔답니다.
그러나 1457년 시월. 끝내 비극이 닥쳤습니다. 노산군에서 다시 서인으로 강봉된 단종이, 사약을 받고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승하하신 것이지요. 그 소식을 들은 원호는 강가에 엎드려 사흘 밤낮을 통곡했답니다. 이웃 사람들이 "이제 그만 우시지요" 하니,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지요. "내 임금이 가셨는데, 어찌 내가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후 원호는 아예 집 안에 틀어박혀 바깥출입을 끊었답니다. 사람을 만나지도, 글을 짓지도,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지요. 세조가 그 이야기를 듣고 호조참의 벼슬을 내려 부르려 하자, 원호는 사신을 내쫓으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다리가 부러져 갈 수가 없소이다. 가서 전하시오, 원호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그러고는 정말로 자기 다리를 망치로 내리쳐 부러뜨렸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옵니다.
그는 그 후로 십수 년을 골방에 누워 지냈습니다. 동쪽으로 난 작은 창문 하나만 열어두고, 그 창으로 영월 쪽 하늘만 바라보았다지요. 죽기 전 마지막 유언이 이러했답니다.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비석도 세우지 말고, 봉분도 만들지 말라. 단지 영월 쪽으로 머리를 두고 묻어다오. 죽어서라도 내 임금을 향해 누워 있고 싶구나." 후세에 정조 임금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원호야말로 백세의 사표(師表)로다. 이 같은 신하 한 사람이 있어 우리 조선이 부끄럽지 않도다" 하시며 친히 시호를 내리셨지요. 정간(貞簡)공. 곧고 간결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강물을 바라보던 그 외로운 선비는, 죽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임금 곁으로 갔던 것입니다.
※ 5: 귀먹은 척, 눈먼 척 살아낸 두 선비의 30년
자, 이번에는 또 다른 두 사람의 생육신을 만나봅시다. 경상도 선산 땅에 이맹전이라는 선비가 있었습니다. 호는 경은(耕隱), '밭 갈며 숨어 산다'는 뜻이지요. 이 분은 단종이 폐위될 무렵, 거창현감 자리에 있었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직 상소를 올리고는 고향 선산으로 내려와 버렸지요. 그러고는 그날부터 이상한 일이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이 안부를 물으면 귀를 가리키며 "에? 무엇이라 하시오? 도통 들리지가 않소" 하고, 글을 쓰라 하면 눈을 비비며 "어허, 글자가 안 보인다네. 내 눈이 멀었지 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귀머거리, 장님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처음에는 식구들도 영문을 몰라 의원을 부르고 약을 달였답니다. 그러나 이맹전은 약사발을 받으면 슬쩍 마당에 부어버리고는 또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지요. 어느 날 밤, 그의 부인이 잠든 줄 알고 가만히 일어나 보니, 남편이 마루에 단정히 앉아 동쪽 하늘 별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더랍니다. 그제야 부인이 깨달았지요. "아, 이 양반이 정말로 귀가 먹은 게 아니라, 이 더러운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것이로구나. 정말로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이 부끄러운 세상을 보지 않으려는 것이로구나." 부인은 그 후로 다시는 의원을 부르지 않았답니다. 다만 남편이 하는 대로 두고 보았을 뿐이지요.
이맹전은 그렇게 무려 삼십 년을 귀머거리, 장님 행세를 하며 살았습니다. 손님이 와도 만나지 않고, 잔칫집 부르심도 가지 않고, 오로지 작은 자기 집 마당에서 밭이나 갈고 닭이나 치며 살았지요. 한 번도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답니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고, 또 성종이 즉위해도, 그는 여전히 못 듣는 척 못 보는 척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단종이 승하하신 시월 스무나흘. 이맹전은 새벽같이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마당에 자리를 깔고는 북쪽을 향해 통곡했답니다. 식구들이 깜짝 놀라 "아버님, 갑자기 어인 일이십니까" 하니,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지요. "오늘이 우리 임금 기일이 아니냐. 이 날만큼은 내가 듣고 보아야 한다." 식구들도 그제야 모두 함께 엎드려 곡을 했답니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이맹전은 다시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죽는 날까지요. 그가 구십 세에 세상을 뜨자,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답니다. 그 멀쩡하던 사람이 평생을 누구를 위해 그렇게 침묵했는지를요.
또 한 분, 함안 땅의 조려라는 선비가 계셨습니다. 호는 어계(漁溪), '고기 잡는 시내'라는 뜻이지요. 이분은 본래 진사시에 합격한 젊은 선비였는데, 단종이 폐위되자 그날로 책을 덮고 고향 함안으로 돌아와 버렸답니다. 그러고는 매일같이 시냇가에 나가 낚싯대를 드리웠지요. 그런데 그 낚싯대에는 늘 미늘이 없었답니다. 즉, 고기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앉아 있기 위한 핑계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선비님, 미늘 없는 낚시로 무슨 고기를 잡으시오" 하면,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나는 고기를 잡는 게 아니라, 세월을 잡는 것이라네" 하였답니다.
조려 선비에 관해서는 참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단종께서 영월에서 승하하시던 그날 밤, 함안에 있던 조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답니다. 식구들이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묻자, 그는 말없이 짚신을 신고 길을 떠났지요. 함안에서 영월까지가 천리 길입니다. 그런데 조려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어, 사흘 만에 영월에 닿았다고 합니다. 청령포에 이르러 보니 단종의 시신이 동강에 떠 있었답니다. 누구도 감히 거두지 못하고 있었지요. 조려는 옷을 벗어 시신을 감싸고, 그것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넜답니다. 그 후 영월 호장 엄흥도와 함께 시신을 거두어 동을지산 양지바른 곳에 모셨다는 이야기. 이것이 오늘날 영월 장릉의 시초라고도 전해집니다. 일을 마친 조려는 그 길로 다시 함안으로 돌아와, 죽는 날까지 미늘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살았다지요. 누구에게도 자기가 영월에 다녀온 일을 말하지 않았답니다. 그저 시냇물만 바라보며, 그 흐르는 물에 자신의 한을 띄워 보냈을 뿐이었지요.
※ 6: 『육신전』을 쓴 청년, 그리고 낚싯대를 든 노인
이제 생육신 여섯 분 중 남은 두 분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분은 남효온, 또 한 분은 성담수. 이 두 분은 나이로 보면 가장 젊은 축에 들었지요. 특히 남효온은 단종이 폐위될 때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답니다. 그러니 정작 그 시대의 한복판을 살아낸 사람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그가 청년이 되어 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육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긴 일이었습니다.
세조가 죽고 성종 임금 시절. 그때까지도 사육신은 역적의 이름을 벗지 못한 채였습니다. 누구도 그들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없었고, 그들의 후손은 노비가 되어 천대받고 있었지요. 청년 남효온은 이 부당함을 견딜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어느 해, 그는 붓을 들고 「육신전(六臣傳)」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성삼문이 어떻게 죽었고, 박팽년이 어떻게 절개를 지켰으며, 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낱낱이 기록한 것이지요. 친구들이 깜짝 놀라 만류했답니다. "여보게, 그 글이 세상에 나가는 날 자네는 죽은 목숨일세. 자네 가문도 풍비박산이 날 것이야!" 그러나 남효온은 단호했지요. "글로 적어 남기지 않으면, 백 년 뒤에는 이 충신들의 이름조차 사라질 것이오. 내가 죽을지언정, 이 글은 살려야 하오."
이 「육신전」이 세상에 알려지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답니다. 어떤 신하는 "남효온의 목을 베어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지요. 그러나 성종 임금께서는 의외로 너그러우셨습니다. "그 또한 의로운 선비가 아니냐. 그냥 두라" 하셨다지요. 덕분에 남효온은 목숨을 부지했지만, 평생 벼슬길은 막혔답니다. 그는 한 번도 과거를 보지 않았고, 한 번도 관직에 오르지 않았으며, 늘 누더기를 걸치고 술병을 차고 다녔지요. 김시습보다 한참 어렸지만, 두 사람은 친구처럼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았답니다. 매월당이 한양에 들를 때면 남효온의 집에 묵었고, 두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며 단종 이야기, 사육신 이야기로 통곡하다가 다시 웃다가 했다지요. 후세에 이 「육신전」이 있었기에 우리가 오늘날 사육신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글 한 편이 백 년의 어둠을 뚫고 진실을 밝힌 것이지요. 남효온은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그 글은 오백 년이 지난 오늘까지 살아남았지요.
또 한 분, 성담수. 이분은 사육신 중 한 분인 성삼문의 사촌 동생이자, 또 다른 사육신 성승의 조카뻘 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가문 전체가 멸문지화를 입고, 살아남은 그도 노비처럼 떠돌아야 했지요. 성담수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여, 경기도 파주 땅으로 숨어들었답니다. 그곳 임진강 가에 작은 초막을 짓고, 평생을 낚시로 보냈지요. 그도 조려 선비처럼 미늘 없는 낚시였답니다. 사람들이 "성생원, 무슨 재미로 그리 사시오" 하면, 그는 강물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며 이렇게 답했다지요. "재미로 사는 게 아니라, 죽지 못해 사는 것이외다."
성담수의 일화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봄날, 한양에서 옛 친구가 그를 찾아왔답니다. 그 친구는 이미 세조 밑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고 있었지요. 친구가 술병을 들고 와서 "여보게 담수, 이런 산골에서 썩지 말고 내가 자네 자리 하나 마련해 줄 테니 한양으로 올라오게" 하니, 성담수가 빙그레 웃으며 그 술을 받아 마셨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강가로 달려가 손가락을 입에 넣어 그 술을 모두 토해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친구가 깜짝 놀라 "이 무슨 짓인가" 하니, 성담수가 입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지요. "자네 술이 더러워서가 아닐세. 이 술이 자네 입을 거쳐 내 입에 들어왔으니, 자네 입에 묻은 그 더러운 임금의 녹(祿)이 함께 들어왔을까 두려워서라네." 친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없이 일어나 떠났답니다. 그 후로 다시는 성담수를 찾는 이가 없었지요. 그는 그렇게 임진강 갈대밭 속에서 늙어, 일흔이 넘어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강 건너 북쪽 영월 쪽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고 전해지지요. 그 웃음의 뜻을 누가 알겠습니까. 다만, 마침내 자기 임금 곁으로 가는 길이 열렸음을 기뻐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짐작할 뿐이지요.
※ 7: 무량사에서 눈을 감은 김시습
자, 이제 다시 매월당 김시습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경주 금오산을 떠난 그는 또다시 정처 없는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그가 가지 않은 곳이 없었지요. 어느덧 그의 나이도 쉰을 넘겼습니다. 한때는 검던 머리가 백발이 되었고, 곧던 허리는 굽었지요. 그러나 그의 가슴속 단종을 향한 마음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답니다. 가는 곳마다 시를 짓고, 만나는 사람마다 호통을 치며, 미친 듯이 살았지요.
그가 마흔일곱 살 되던 해, 잠시 머리를 기르고 환속한 적이 있었답니다. 안씨 성을 가진 양가집 규수와 혼례를 올린 것이지요. 그러나 이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부인이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지요. 그뿐 아니라, 마침 폐비 윤씨 사건이 터져 조정이 다시 한번 피바다가 되자, 김시습은 통곡하며 이렇게 외쳤답니다. "아, 이 나라는 끝내 안 되겠구나. 한 번도 모자라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는 다시 머리를 깎고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출가였지요.
말년의 그가 정착한 곳은 충청도 부여 무량사라는 절이었답니다. 만수산 깊은 골짜기. 산세가 부드럽고 물이 맑은 곳이었지요. 무량사에서 그는 비로소 평온을 찾은 듯했습니다. 더는 미친 척하지도, 더는 욕설을 퍼붓지도 않았지요. 그저 조용히 책을 읽고, 시를 짓고, 어린 사미승들에게 글을 가르쳤답니다. 어느 가을날, 제자 한 명이 그에게 물었다지요. "스승님, 평생 그토록 한 분 임금만을 그리워하시며 사셨는데, 후회는 없으십니까?" 김시습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답니다. "후회라… 사람이 한평생 사랑할 사람 하나, 사랑할 임금 하나, 사랑할 의리 하나만 있어도 잘 산 인생이 아니겠느냐. 나는 그 셋을 다 가졌으니, 가난하게 살았으나 부자였고, 외롭게 살았으나 외롭지 않았느니라."
성종 24년, 1493년 봄. 매월당 김시습은 무량사에서 조용히 입적했습니다. 향년 쉰아홉. 임종 직전,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유언했다지요. "나를 화장하지 말고, 그대로 묻어두어라. 내 시신이 썩지 않거든, 그것은 내가 끝내 부처가 되지 못하고 한 사람의 신하로 죽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신기하게도 제자들이 삼 년 후 그의 무덤을 열어보니, 시신이 살아 있을 때처럼 그대로였답니다. 얼굴색은 살아 있는 듯했고, 수염은 자라 있었다지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 "스님이 부처가 되셨다!" 하고 외쳤지만, 정작 그 자신은 부처가 되기를 거부한 채, 한 사람의 신하로 남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매월당의 마지막 충절이었지요.
세월이 흘러 숙종 임금 17년, 비로소 단종이 복위되고 묘호가 올려졌습니다. 그리고 정조 임금에 이르러 사육신이 신원되고, 또 생육신 여섯 분도 모두 시호를 받으셨지요. 김시습에게는 청간(淸簡), 원호에게는 정간(貞簡), 이맹전에게는 정간(靖簡), 조려에게는 정절(貞節), 남효온에게는 문정(文貞), 성담수에게는 정숙(靖肅). 각기 다른 시호였지만, 그 뜻은 모두 한가지. '맑고 곧다'는 것이었지요. 정조 임금께서는 이 여섯 분을 추모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사육신은 죽음으로써 의(義)를 이루었고, 생육신은 삶으로써 의를 지켰도다. 죽는 것이 어려운가, 사는 것이 어려운가. 나는 사는 것이 더 어려웠다 하노라."
여러분, 오늘 우리는 권력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종종 잊고 삽니다. 큰 것을 좇느라 정작 자기 마음 하나를 잃어버리고, 빠른 길을 찾느라 정작 자기 양심 하나를 버리지요. 그러나 오백 년 전 이 여섯 분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도 평생 지킨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내 마음 하나'였지요. 미친 척, 귀먹은 척, 눈먼 척, 죽은 척. 그 척하는 삶 속에 진짜 살아 있는 영혼이 있었던 것입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 속에서, 끝내 흘러가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바로 생육신이었습니다.
유튜브 엔딩 멘트 (250자 내외)
여러분, 오늘 매월당 김시습과 다섯 분 생육신의 이야기 어떠셨습니까. 권력은 짧고 의리는 긴 것임을, 이 여섯 분의 발자취가 우리에게 말없이 일러주는 듯합니다. 끝까지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영상이 마음에 와닿으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알림 설정 부탁드립니다. 다음 편에서는 또 한 편의 잊지 못할 조선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도 평안한 밤 되시기를 바라며, 매월당의 시 한 구절 남기고 물러갑니다. "구름 가는 길, 바람 부는 길. 그곳이 바로 내가 가는 길이라."
썸네일 프롬프트 (영어, 16:9, no text)
A solitary elderly Korean Joseon-dynasty scholar-monk in tattered hanbok robe and worn straw hat, standing alone on a misty mountain cliff at dawn, gazing eastward toward a pale crescent moon over distant mountains, autumn maple leaves drifting in the wind, his white beard and long sleeves fluttering, a bamboo walking staff in hand, soft golden sunrise light breaking through grey clouds, melancholic and dignified atmosphere, traditional Korean ink-painting aesthetic blended with cinematic realism, deep blues and muted earth tones with warm amber highlights, ultra-detailed cinematic composition, 16:9 aspect ratio, no text, no letters, no waterm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