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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왕자의 난, 마지막 권력 투쟁 - 태종의 왕권 공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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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멘트 (300자)

    1400년 정월, 개성 한복판에서 형제가 칼을 맞대고 싸웠습니다. 2년 전 피로 얼룩진 제1차 왕자의 난에 이어, 또다시 왕실에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남산에서 선죽교까지, 개성의 거리마다 형제의 군사들이 맞붙어 싸웠습니다. 승리한 이방원은 그해 11월 마침내 왕위에 올랐지만, 그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참으로 컸습니다. 형제를 칼로 제압하고 얻은 왕좌, 그 위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피로 쓴 권력의 역사,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에 기록된 제2차 왕자의 난의 전말을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1400년 정월 28일, 개성에서 벌어진 이방간과 이방원의 시가전부터 태종의 즉위까지, 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재현했습니다. 박포의 모략, 태조와 정종의 한탄, 개성 거리를 피로 물들인 전투, 그리고 승리 후 이방원이 걸어간 냉혹한 권력의 길까지. 시니어 여러분께서 편안하게 들으실 수 있도록 이야기꾼이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구성했습니다. 역사의 교훈이 담긴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 그 비극의 밤

    1398년 8월 26일 밤, 개경의 하늘에 비명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날 밤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밤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밤이었습니다.
    다섯째 왕자 이방원이 군사를 이끌고 움직였습니다.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정도전, 그리고 그의 일파였습니다. 칼부림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정도전이 자신의 집에서 급습을 당해 칼에 맞아 쓰러졌고, 남은과 심효생도 그날 밤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라 불리던 이들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비극은 그 다음날 벌어졌습니다. 어린 세자 이방석이 도망치다 붙잡혔습니다. 불과 열여섯 살의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형 이방번도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태조 이성계가 가장 사랑했던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들이었습니다. 태조가 정도전과 함께 조선의 미래로 키워온 왕자들이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태조 이성계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자신이 세운 나라에서, 자신의 아들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태조는 며칠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고, 밤마다 통곡했다고 합니다.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3년, 그 아들들마저 이렇게 떠나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정종실록은 이 비극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인년 8월, 정안공 방원이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과 남은을 죽이고 의안대군 방석과 무안대군 방번을 제거했다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태조가 크게 슬퍼하여 병이 들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태조는 왕위를 버렸습니다. 더 이상 왕좌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 이방과가 뒤를 이어 정종으로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정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실제 권력은 난을 일으킨 이방원이 쥐고 있었습니다.
    정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399년, 이방원은 조례상정도감판사가 되어 나라의 법령을 정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강원도와 동북면의 군사권을 장악했습니다. 왕은 형 정종이었지만, 군사와 행정을 움직이는 것은 동생 이방원이었습니다. 신하들도 알고 있었고, 백성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진짜 권력자가 누구인지를.
    정종에게는 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습니다. 후궁에게서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적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때 조박의 친척인 불노라는 아이를 양자로 들여 원자로 삼으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이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누가 다음 왕이 될 것인가는 너무나 명백했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넷째 왕자 이방간이었습니다. 그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과 함께 싸웠습니다. 칼을 들고 함께 정도전의 집을 습격했고, 함께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데 왜 동생만 권력을 독차지하는가. 왜 자신은 구석으로 밀려나야 하는가. 이방간의 가슴속에는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실록은 이방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회안공 방간은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가 있었으나, 인격과 공훈과 위세가 방원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위험한 감정이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 불안한 평화

    박포라는 무장이 있었습니다. 지중추부사를 지낸 이 사람은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이방원에게 미리 알려준 사람이 바로 박포였습니다. 이 정보 덕분에 이방원은 먼저 선수를 칠 수 있었고, 난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박포는 당연히 자신이 일등공신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없었다면 이방원도 없었을 것이고, 난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1398년 정사공신 책봉식에서 박포의 이름은 일등공신 명단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박포는 격분했습니다. 곳곳에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며 원망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이방원에게도 따졌고, 다른 신하들에게도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결국 박포는 죽주,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유배지에서 박포는 원한을 삭이지 못했습니다. 추운 겨울날도, 더운 여름날도, 그의 마음속에는 이방원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만 가득했습니다. 자신을 버린 이방원, 자신의 공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이방원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올랐습니다.
    그러던 1399년 말, 박포는 유배에서 풀려났습니다. 개경으로 돌아온 박포의 눈에 조정의 상황이 들어왔습니다. 이방원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고, 다른 형제들은 불만에 차 있었습니다. 특히 넷째 형 이방간의 불만이 컸습니다. 박포는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1400년 정월, 박포는 이방간을 찾아갔습니다. 정종실록은 이 장면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중추부사 박포가 방간에게 와서 거짓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했을까요. 정안공 방원이 장차 대군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었습니다. 박포는 이방간을 선동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미 의심과 불안에 가득 차 있던 이방간은 이 말을 믿었습니다. 아니, 믿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동생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명분이 생긴다면, 먼저 칼을 뽑을 이유가 생기는 것이니까요.
    박포는 이방간에게 계속 속삭였습니다. 지금 대군께는 세 가지 길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첫째,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조용히 사는 것. 둘째, 먼 곳으로 피해서 목숨을 보전하는 것. 셋째, 군사를 일으켜 먼저 치는 것.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부추긴 것입니다.
    이방간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첫째 길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왕자이고, 자신도 난에 참여했는데 왜 권력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둘째 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망쳐서 숨어 사는 것은 겁쟁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셋째 길뿐이었습니다.
    이방간은 자신의 군사력을 점검했습니다.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도 있었습니다. 이방원의 군사보다는 적었지만 기습을 한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개경에서는 지리를 잘 아는 것도 유리한 점이었습니다.
    박포는 계속해서 이방간을 부추겼습니다. 지금이 기회라고, 늦으면 정말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먼저 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속삭였습니다. 이방간의 주변 사람들도 둘로 나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렸지만, 어떤 이들은 부추겼습니다.
    결국 이방간은 결심을 굳혔습니다. 군사를 일으키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비밀로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이방간의 처조카인 이래라는 사람이 이 계획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래는 자신의 스승인 우현보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우현보는 곧바로 이방원에게 달려가 보고했습니다.
    이방원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형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박포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곧 칼부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이방원은 자신의 측근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의안대군 이화, 아버지의 의형제인 이지란, 조영무 등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대책을 세웠습니다.

    ※ 박포의 독

    1400년 정월 28일, 개경의 아침은 평소와 다름없이 밝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조선 역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 새겨지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방간이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사냥을 핑계로 군사를 모았고, 개경 시내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동생 이방원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방간은 먼저 형 정종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행동을 알렸습니다.
    정종실록은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간이 상장군 오용권을 시켜 왕에게 아뢰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가슴을 찢습니다. 정안공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놀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종은 크게 노했습니다. 형으로서, 왕으로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도승지 이문화를 이방간에게 보내 꾸짖었습니다. 실록에 기록된 정종의 말은 참으로 절절합니다. 난언을 듣고 동기를 해치려 하니 미쳤다는 것입니다. 패악하기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군사를 해산하고 홀로 궁으로 들어와 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방간은 아버지 태조가 머무는 상왕전을 지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태조의 반응은 이방간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태조는 절규했습니다. 실록은 태조의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네가 방원이와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모두 동복동부의 형제가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방간은 당황했습니다. 아버지도, 형도,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쳤다고, 패악하다고 질책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군사를 일으킨 마당에 물러설 수도 없었습니다. 이방간은 전의를 상실했지만 그래도 진격을 계속했습니다.
    이방원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형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고, 대응 방안도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방원은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두 형제의 군사가 개경 시내에서 맞붙었습니다.
    전투는 개경의 남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남산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서 첫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방간의 군사와 이방원의 군사가 칼과 창을 들고 싸웠습니다. 형제의 군사가 서로를 죽이는 참혹한 광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싸움은 선죽교 쪽으로 이어졌습니다. 정몽주가 이방원의 아버지 이성계를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했던 그 다리, 선죽교 근처까지 전투가 확대되었습니다. 개경의 거리 곳곳에서 칼부림이 벌어졌습니다. 백성들은 집 안에 숨어 떨었고, 거리에는 비명과 함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하지만 승부는 빠르게 갈렸습니다. 이방원의 군사가 숫자에서도, 훈련도에서도, 지휘 체계에서도 우위에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방간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아버지와 형의 질책이 마음을 흔들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명분도 약했습니다.
    결국 이방간의 군사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부하들이 하나둘 도망쳤고, 이방간 자신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방간은 체포되었습니다.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박포도 붙잡혔습니다.
    정종실록은 그날의 결과를 간단명료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원이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 이방간과 박포가 체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전투가 끝난 개경 거리는 참혹했습니다. 곳곳에 시신이 널려 있었고, 피가 거리를 붉게 물들였습니다. 불과 2년 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미 한 번 피를 본 왕실이, 또다시 형제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이방간은 곧바로 심문을 받았습니다. 왜 군사를 일으켰느냐는 물음에 이방간은 박포의 말을 믿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이것을 변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박포는 더 혹독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은 단지 방간을 도왔을 뿐이라고 했지만, 결국 자신이 형제를 이간질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등공신이 되지 못한 원한 때문이었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조정 신하들의 의견은 명확했습니다. 방간과 박포 모두 역모를 꾀한 죄로 목숨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원의 처분은 달랐습니다. 박포는 죽주로 유배 보냈다가 결국 사형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형 이방간은 살려두었습니다.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처벌을 끝낸 것입니다.
    왜 이방원은 형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이미 2년 전에 이복동생들을 죽인 이방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동복형제를 죽이는 것은 달랐습니다.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를 죽인다면 민심이 흉흉해질 것이 뻔했습니다. 조선 왕실 전체의 정통성에도 흠이 갈 수 있었습니다. 이방원은 현명하게 판단했습니다. 책임은 모두 박포에게 돌리고, 형은 목숨만은 살려준 것입니다.
    난이 평정된 지 사흘 후인 정월 그믐날, 1400년 2월 1일,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정종이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한 것입니다. 이방원의 심복인 참찬문하부사 하륜이 주청했고,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받아 이를 승인했습니다. 이제 이방원이 다음 왕이 되는 것은 공식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이방원은 마침내 왕위에 올라 태종이 되었습니다.

    ※ 개성의 시가전

    난이 진압된 개경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습니다. 거리에는 전투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백성들은 또다시 벌어진 왕실의 비극에 혀를 찼습니다. 불과 2년 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나라가 뒤흔들렸는데, 또다시 형제가 칼을 겨눴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방간은 포박되어 궁궐로 끌려왔습니다. 한때는 당당했던 왕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초라한 죄인의 모습만 남아 있었습니다. 조정 신하들은 엄한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역모를 꾀한 죄는 삼족을 멸해도 모자랄 대역죄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째 왕자의 난이었기에,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엄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이방원은 신중했습니다. 형을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명분도 충분했고, 신하들도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원은 더 멀리 내다보았습니다. 2년 전에 이미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죽였습니다. 백성들은 그것만으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동복형제까지 죽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이방원을 어떻게 볼까요. 권력을 위해서라면 형제도 서슴없이 죽이는 냉혹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조선 왕실 전체가 피로 얼룩진 집안으로 낙인찍힐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원 개인에게도, 조선이라는 나라 전체에도 큰 상처가 될 것이었습니다.
    이방원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방간을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목숨은 살려주되 권력에서는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종실록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거병작란하여 동기를 모해했다는 죄명으로 방간은 토산으로 유배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박포에 대한 처벌은 가혹했습니다. 박포는 먼저 죽주로 유배를 갔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형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모든 난의 책임을 박포에게 돌린 것입니다. 박포가 거짓말로 형제를 이간질했고, 박포가 이방간을 선동해 난을 일으키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전부 사실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후대 역사가들은 박포만의 책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평가합니다. 이방간도 이미 불만이 가득했고, 왕위에 대한 야심이 있었습니다. 박포는 단지 불씨를 당긴 것일 뿐, 불씨 자체는 이미 이방간의 마음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는 진실보다 명분이 중요한 법입니다. 이방원은 형을 살리기 위해 박포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웠고, 조정 신하들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박포는 역적으로 낙인찍혀 처형되었고, 이방간은 왕자의 신분을 유지하면서도 권력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난이 평정된 지 사흘 후인 2월 1일, 역사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정종이 참찬문하부사 하륜의 주청을 받아들여 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한 것입니다. 이때 하륜은 상왕 태조의 허락도 받았습니다. 태조는 여전히 이방원을 곱게 보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자 책봉으로 이방원의 지위는 확고해졌습니다. 이제 왕위 계승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방원은 세자로 책봉된 후에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제도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가장 먼저 손댄 것이 사병 혁파였습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이 일어난 근본 원인이 바로 왕자들과 공신들이 각자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원은 모든 사병을 없애고 군권을 삼군부로 일원화했습니다. 이제 군사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것, 왕의 것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관제를 개혁했습니다.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새로 설립했습니다. 중추원은 삼군부로 고쳐 군권을 적절히 배분했습니다. 그리고 승정원을 따로 두어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게 했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것입니다.
    정종은 동생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습니다. 형식상으로는 왕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미 물러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400년 11월, 정종은 마침내 왕위를 이방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세자로 책봉된 지 불과 9개월 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원은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으로 즉위했습니다.

    ※ 승리와 그 대가

    1400년 11월 28일, 수창궁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방원은 이제 정식으로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즉위식이 끝난 후에도 태종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왕위에는 올랐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종은 냉정하게 주변을 살폈습니다. 우선 공신들이 문제였습니다. 제1차와 제2차 왕자의 난을 함께 치른 공신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뭉친다면 왕권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태종은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1401년에는 정사공신과 좌명공신을 책봉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포상이 아니었습니다. 공신들을 서열화하고, 그들 사이에 견제와 균형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위협이 되는 공신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습니다.
    1404년에는 태조와 태종의 사돈이었던 이거이 부자를 제거했습니다. 3년 전 사병 혁파를 놓고 불만을 표시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이거이와 그의 아들 이저를 귀양 보낸 것입니다. 한때는 개국공신이었고 왕실의 사돈이었지만, 왕권에 위협이 된다면 용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태종이 제거한 가장 큰 세력은 놀랍게도 자신의 처가였습니다.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 민씨의 친정이었습니다. 장인 민제는 개국공신이었고, 네 명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는 모두 태종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민씨 가문이 너무 강해진 것입니다. 세자인 양녕대군이 외가에서 자라면서 외삼촌들과 매우 가까워졌습니다. 민씨 형제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태종은 이것을 외척의 발호로 보았습니다.
    1407년, 태종은 계략을 썼습니다. 어느 날 신하들을 모아놓고 갑자기 선언했습니다. 이제 왕위에서 물러나 세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하들은 놀랐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태종은 못 이기는 척 명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다른 표정을 지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였습니다. 그들은 실망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세자가 즉위하면 자신들의 권력이 더 커질 것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태종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이 민씨 형제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태종은 그들을 유배 보냈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명령했습니다.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처남들이었지만 용서가 없었습니다. 1415년에는 남은 처남인 민무휼과 민무회도 불충을 이유로 사형에 처했습니다.
    왜 태종은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역사가들은 태종의 이런 행동을 왕권 강화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평가합니다. 고려 말의 혼란이 외척의 발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태종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선이 같은 길을 걷지 않으려면, 외척을 미리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태종은 또한 호패법을 실시했습니다.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호패를 차게 하여 인구를 파악하고 세금과 군역을 정확히 부과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신문고 제도도 태종 때 제대로 자리 잡았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직접 왕에게 호소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입니다. 이것은 중간의 관리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안정시켰습니다. 1401년 6월, 명나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았습니다. 이제 조선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독립 국가가 된 것입니다. 태종은 명나라에 대해서는 사대의 예를 갖추면서도, 실리를 챙기는 외교를 펼쳤습니다.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회유와 강경을 병행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 태종의 즉위

    1418년 8월 10일, 태종은 아들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하고 셋째 아들을 세자로 삼은 지 두 달 만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바로 후에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게 되는 세종입니다. 태종은 상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군권을 쥐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태종의 재위 18년은 조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는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왕권을 강화하고 신권을 억제하여 조선이 왕조 국가로서 제대로 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죽은 사람들의 명단은 길기만 합니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남은, 심효생, 이방석, 이방번이 죽었습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박포가 처형되었고, 이방간은 유배되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더 많은 사람이 제거되었습니다. 공신인 이거이 부자,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형제, 그리고 이무, 윤목, 유기 등 수많은 사람이 태종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었습니다. 심지어 제1차 왕자의 난 때 군사력의 기반이었던 이숙번도 1415년에 축출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태종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당대에는 냉혹한 군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형제도, 처남도, 공신도 가차 없이 제거하는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신하들은 태종 앞에서 항상 긴장해야 했고, 한마디 말을 잘못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종 자신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실록을 보면 태종도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1402년 12월 2일, 태종은 유배지에 있는 형 이방간에게 글을 보냈습니다. 그 내용이 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태종은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다음부터 형을 잘 보호하려고 애썼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마도 태종은 형을 해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권력의 논리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형제간의 정을 지키고 싶었지만,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냉혹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권력의 비극입니다.
    태종은 1422년 5월 10일,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상왕이 된 지 4년 만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아들 세종에게 남긴 말이 있었습니다. 실록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자신이 걸었던 피의 길을 아들은 걷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세종은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세종은 형제를 죽이지 않았고, 외척을 제거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함께 나라를 이끌어갔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버지 태종이 이미 왕권을 확고히 다져놓았기 때문입니다.
    태종이 피를 흘리며 다진 왕권의 기반 위에서, 세종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글을 창제하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영토를 넓히고, 문화를 융성하게 한 세종의 업적은 사실 태종이 닦아놓은 기틀 위에서 가능했습니다.
    역사가들은 태종을 평가할 때 항상 이 양면성을 이야기합니다. 한편으로는 형제와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냉혹한 군주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왕조의 기틀을 확고히 다진 능력 있는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태종 자신도 이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악역을 맡아 피를 흘림으로써, 아들의 시대는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미움을 받음으로써, 조선이라는 나라는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이 태종 이방원이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제2차 왕자의 난에서 형 이방간을 이기고 왕위에 오른 그날부터, 태종은 이미 이 길을 가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역사는 그를 냉혹한 군주로 기억하지만, 동시에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명군으로도 기억합니다. 그것이 권력이 주는 영광이자 저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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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0년 정월, 개성 거리를 피로 물들인 형제의 싸움, 제2차 왕자의 난. 승리한 이방원은 그해 11월 태종으로 즉위했지만, 그가 걸어야 했던 길은 외로웠습니다. 형제를 유배 보내고, 공신을 제거하고, 심지어 자신의 처남들까지 죽여야 했습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던 냉혹한 군주, 그러나 그 피의 대가로 조선은 안정을 찾았고, 아들 세종의 시대는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역사는 때로 누군가의 희생과 냉혹함 위에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태종 이방원, 그는 스스로 악역을 자처함으로써 조선 500년의 기틀을 다진 왕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기록한 피로 쓴 권력의 역사,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세종의 시대로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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