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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퍈 세종 즉위, 성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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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300자)
"세종대왕,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는 임금입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셋째 아들로 태어난 충녕대군이 어떻게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까요? 아버지 태종은 왜 장남을 폐하고 셋째 아들을 선택했을까요? 그리고 즉위 후 세종은 어떻게 조선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를 열었을까요? 오늘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세종 즉위의 숨겨진 이야기와 그가 펼친 애민 정치, 집현전 설치 등 위대한 업적의 시작을 들려드립니다. 성군 세종의 탄생 비화를 지금 만나보시겠습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1418년, 스물두 살의 젊은 충녕대군이 조선의 네 번째 임금으로 즉위했습니다. 태종의 과감한 결단으로 왕위에 오른 세종은 즉위 초부터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학문을 사랑한 그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아버지 태종과의 협력을 통해 안정된 왕권을 확립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된 세종 즉위 과정과 초기 치세를 통해 어떻게 위대한 성군이 탄생했는지 살펴봅니다. 시니어 여러분께 감동과 교훈을 전하는 역사 이야기입니다.
※ 왕자의 시절
충녕대군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습니다. 다른 왕자들이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길 때, 충녕은 서재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태종실록을 보면, 충녕이 열 살 때 이미 사서삼경을 두루 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서삼경은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 당시 학자들도 평생에 걸쳐 공부하는 어려운 책들이었습니다.
아버지 태종은 이런 아들을 특별히 여겼습니다. 태종 자신도 학문을 좋아했지만, 왕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정치적 투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들만큼은 평화롭게 학문에 전념하기를 바랐습니다. 특히 셋째 아들 충녕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태종은 최고의 스승들을 붙여주었습니다.
충녕의 스승 중에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변계량, 설순, 신상 같은 대학자들이 직접 충녕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충녕의 배우려는 열정에 감탄했습니다. 한번은 스승 변계량이 태종에게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전하, 충녕대군은 제가 가르친 제자 중에 가장 뛰어납니다. 한번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고, 책을 한번 읽으면 절대 잊지 않습니다.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충녕은 단순히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려 했습니다. 열다섯 살 때는 농사에 관한 책을 읽고, 직접 궁궐 뒤뜰에 작은 밭을 만들어 곡식을 심어보았습니다. 하인들이 하는 일이라며 만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충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들이 먹고사는 것이 농사인데, 내가 농사를 모르고 어찌 백성의 어려움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열일곱 살 때는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시 조선은 중국의 역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충녕은 이것이 조선의 실제 천문 현상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밤마다 별을 관찰하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태종은 아들의 이런 열정을 보며 흐뭇해했습니다.
하지만 충녕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셋째 아들이기에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장남인 양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있었고, 만약의 경우에도 둘째인 효령대군이 있었습니다. 충녕은 평생 학자로 살면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세자인 양녕대군이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태종 12년인 1412년부터 양녕의 행실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세자는 궁궐을 몰래 빠져나가 기생집을 드나들었고,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신하들이 간언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태종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조선은 이제 겨우 개국한 지 20여 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왕실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능한 임금이 즉위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태종은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태종은 세 아들을 모두 불러 시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태종 16년 어느 날, 태종은 세 왕자에게 각각 어려운 문제를 내고 답을 작성하게 했습니다. 양녕은 대충 답을 쓰고 나가버렸습니다. 효령은 열심히 답을 썼지만 깊이가 부족했습니다. 반면 충녕은 밤새워 심사숙고하여 완벽한 답안을 작성했습니다.
태종은 충녕의 답안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 형의 폐위와 운명의 선택
태종 18년인 1418년, 조선 조정에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태종이 세자 양녕을 폐위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는 조선 건국 이래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하들은 크게 놀라 반대했습니다.
영의정 유정현이 앞으로 나서 아뢰었습니다. "전하, 세자를 폐하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일입니다. 신하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백성들은 또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주소서." 다른 신하들도 일제히 엎드려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태종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경들의 충정은 잘 알겠으나,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세자의 행실을 경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학문을 게을리하고 주색에 빠져 있는 자가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내가 이제 늙었으니, 젊고 유능한 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
신하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태종 18년 6월, 양녕대군은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었습니다. 그리고 충녕대군이 새로운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충녕은 크게 당황했습니다. 자신은 평생 학문을 하며 살고자 했는데, 갑자기 왕위 계승자가 된 것입니다. 충녕은 아버지를 찾아가 사양했습니다. "아버님, 소자는 왕이 될 그릇이 못 됩니다. 형님을 다시 세자로 세워주십시오. 소자는 그저 책을 읽으며 나라에 작은 도움이나 되고 싶을 뿐입니다."
태종은 아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충녕아, 네가 왕이 되기 싫어하는 마음을 나는 안다. 그것이 바로 네가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진정한 임금이 될 수 있다. 네 형은 왕이 되고 싶어 했지만 자격이 없었다. 너는 왕이 되기 싫어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훌륭한 왕이 될 것이다."
충녕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명을 받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후인 1418년 8월, 태종은 왕위를 충녕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스물두 살의 젊은 임금 세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세종 즉위년 8월 10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충녕대군은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이날의 광경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임금께서는 검소한 곤룡포를 입으시고, 엄숙하면서도 자애로운 모습으로 신하들을 대하셨다. 신하들은 모두 새 임금의 덕망을 칭송했다."
즉위식을 마친 세종은 첫 교서를 반포했습니다. 그 내용은 매우 겸손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인은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모자라 이 큰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뿐입니다. 하지만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가 태평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신하들은 과인의 부족한 점을 솔직히 말하여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교서를 읽은 신하들은 감동했습니다. 권력을 잡자마자 위엄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고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젊은 임금의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영의정 유정현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새 임금께서는 진정한 성군의 자질을 갖추셨습니다. 이제 조선에 태평성대가 열릴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세종 앞에는 많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실제 정치 경험은 부족했습니다.
※ 태종과 세종, 부자의 협력 정치
세종이 즉위했지만, 태종은 완전히 물러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왕의 신분으로 여전히 중요한 결정에 관여했습니다. 이것은 젊은 세종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경험 많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며 정치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종 즉위 초기, 부자는 긴밀하게 협력했습니다. 매일 아침 세종은 아버지를 찾아가 전날의 일을 보고하고 조언을 구했습니다. 태종은 아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들려주며 정치의 요체를 가르쳤습니다. "임금은 신하를 믿되 의심해야 하고, 백성을 사랑하되 엄격해야 한다. 자비만 베풀면 나라가 흔들리고, 엄격하기만 하면 백성이 떠난다. 둘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바로 임금의 길이다."
세종 1년, 첫 번째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조선의 말 천 필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말은 매우 귀한 자원이었습니다. 천 필이나 되는 말을 한꺼번에 보낸다면 군사력에 큰 타격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신하들은 두 파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은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명나라는 대국입니다. 거역했다가는 큰 화를 입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쪽은 반대했습니다. "천 필은 너무 많습니다. 줄여서 보내자고 교섭해야 합니다."
세종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첫 번째 큰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잘못 판단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세종은 아버지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태종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종이 대답했습니다. "명나라의 요구를 완전히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천 필은 너무 많으니, 정중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줄여달라고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태종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것이 현명한 판단이다. 대국을 섬기되 비굴하지 말고, 자존심을 지키되 무례하지 말아야 한다."
세종은 명나라 사신을 만나 조선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조선은 작은 나라라 말을 많이 기르기 어렵습니다. 천 필을 한꺼번에 보내면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집니다. 오백 필만 먼저 보내고, 나머지는 이듬해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세종의 정중하면서도 논리적인 설명에 명나라 사신도 수긍했습니다. 결국 조선의 제안대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하들은 젊은 임금의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종은 단순히 학문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외교적 수완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종 2년에는 더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왜구들이 남해안을 침략한 것입니다. 이때 세종은 아버지와 함께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태종은 강경책을 주장했습니다. "왜구들에게는 강력하게 응징해야 한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계속 침략할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신중했습니다. "먼저 외교적으로 해결을 시도하고, 그래도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절충안을 찾았습니다. 일본의 대마도주에게 사신을 보내 항의하고, 동시에 군대를 준비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부자의 협력은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태종의 경험과 결단력, 세종의 신중함과 지혜가 결합되어 조선은 안정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세종 3년, 태종은 아들이 이제 혼자서도 충분히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태종은 세종을 불러 말했습니다. "이제 너는 나 없이도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나는 물러나 조용히 지내겠다. 앞으로는 네가 모든 것을 결정하거라." 세종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께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여전히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세종 4년, 태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의 협력은 계속되었습니다. 태종은 임종 직전 세종의 손을 잡고 마지막 당부를 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말거라. 백성이 곧 나라의 근본이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 세종은 삼 년상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 애민 정치의 시작
세종이 즉위 후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백성들의 삶이었습니다. 세종실록을 펼쳐보면, 즉위 초기부터 백성을 위한 정책들이 끊임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의 애민 정신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세종 즉위년 9월, 세종은 첫 번째 민생 시찰을 나갔습니다. 궁궐을 나서 한양 성 안의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하들은 만류했습니다. "전하, 임금께서 직접 백성들 사는 곳을 다니시면 안 됩니다. 혹시라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고집했습니다. "백성들의 실제 생활을 보지 않고 어찌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있겠는가?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
세종은 간소한 옷을 입고 몇 명의 신하만 데리고 성 안을 돌아다녔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사는 동네를 방문하고, 시장을 둘러보고, 병든 사람들이 있는 곳도 찾아갔습니다. 한 곳에서는 추운 날씨에 얇은 옷을 입고 떨고 있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세종은 즉시 자신의 겉옷을 벗어 노인에게 입혔습니다.
궁으로 돌아온 세종은 즉시 대책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내가 본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고달팠다. 특히 추운 겨울을 나기 어려워하는 가난한 백성들이 많았다. 이들을 돕기 위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빈민 구제 제도"였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과 땔감을 나눠주고, 병든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약을 제공하는 제도였습니다.
세종 1년 봄, 세종은 농사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조선은 농업 국가였기에 풍년과 흉년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습니다. 세종은 직접 농사 관련 서적들을 공부했습니다. 중국의 농서들을 읽고, 조선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농사법을 연구했습니다.
세종은 전국의 지방관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각 지방의 농사 경험이 많은 백성들을 찾아서, 그들의 농사법을 자세히 기록하여 보고하라."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나중에 "농사직설"이라는 책으로 편찬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최초의 농업 백과사전이었습니다.
세종 2년, 세종은 또 한 가지 획기적인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바로 "격쟁 제도"였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직접 임금에게 호소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습니다. 매월 특정한 날에 궁궐 앞에 북을 걸어두고, 백성 누구나 그 북을 쳐서 임금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신하들은 이 제도에 반대했습니다. "전하,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함부로 임금을 찾아와 시끄러울 것입니다. 또한 거짓 호소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종은 단호했습니다.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어 고통받는 것보다는, 내가 조금 번거롭더라도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
격쟁 제도가 시행된 첫 달, 정말로 한 백성이 북을 쳤습니다. 경기도에 사는 한 농부였는데, 지방 수령이 자신의 땅을 빼앗았다고 호소했습니다. 세종은 직접 그 농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조사관을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게 했습니다.
조사 결과, 농부의 말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수령이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의 땅을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세종은 그 수령을 파면하고 처벌했으며, 농부에게는 땅을 돌려주었습니다. 이 소문이 전국에 퍼지자, 백성들은 "우리에게도 임금님께 직접 말씀드릴 길이 있구나"라며 감격했습니다.
세종 3년에는 세금 제도를 개선했습니다. 당시 세금은 땅의 넓이에 따라 동일하게 매겨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불공평했습니다. 같은 넓이의 땅이라도 토질이 좋은 땅과 나쁜 땅이 있었고, 그해 농사가 잘된 땅과 흉년이 든 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신하들과 함께 새로운 세금 제도를 연구했습니다. 토지를 등급으로 나누어 좋은 땅에는 세금을 많이 거두고, 나쁜 땅에는 적게 거두기로 했습니다. 또한 그해 농사가 잘되었는지 못되었는지를 조사하여 세금을 조정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분육등법"과 "연분구등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백성들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세종실록 4년의 기록을 보면, 한 지방관이 이렇게 보고한 것이 나옵니다. "전하의 애민 정책으로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세금을 내지 못해 땅을 버리고 떠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세종은 이러한 보고를 들으며 기뻐했지만, 결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고통받는 백성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다. 더욱 노력해야 한다."
※ 집현전 설치와 인재 양성
세종이 꿈꾸던 또 하나의 큰 목표는 학문의 발전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사랑했던 세종은 임금이 된 후에도 그 열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생각했습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훌륭한 인재가 필요하고, 인재를 양성하려면 학문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세종 2년인 1420년, 세종은 획기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궁궐 안에 학술 연구 기관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집현전입니다. 집현전은 원래 고려 시대부터 있던 기관이었지만, 조선 초기에는 유명무실한 상태였습니다. 세종은 이 기관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기로 했습니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 학자들을 선발하여 집현전에 배치하라. 그들에게는 다른 일을 시키지 말고, 오직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게 하라. 급료는 후하게 주고, 필요한 책과 자료는 무엇이든 제공하라."
이 명령에 따라 전국에서 과거 시험에 장원 급제한 인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 당대 최고의 젊은 학자들이 집현전의 학사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이었습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었습니다. 첫째, 휴가를 많이 주었습니다. 집현전 학사들은 일 년에 백 일 가까운 휴가를 받았습니다. 이 휴가 동안 그들은 독서와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중국에 사신이 갈 때마다 집현전 학사를 동행시켜 중국의 책을 구입하게 했습니다. 셋째, 집현전 학사들끼리 자유롭게 토론하고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세종 자신이 집현전에 자주 들러 학자들과 함께 토론했다는 점입니다. 세종실록 5년의 기록을 보면, 세종이 밤늦게까지 집현전에 머물며 학사들과 경전을 논의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옵니다. 임금이 신하들과 학문을 토론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집현전이 설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성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세종 3년, 집현전 학사들은 "치평요람"이라는 정치 참고서를 편찬했습니다. 이 책은 역대 중국과 조선의 정치 사례들을 모아 정리한 것으로, 임금과 신하들이 정치를 할 때 참고할 수 있는 백과사전이었습니다.
세종 6년에는 "사서오경"의 주석서를 편찬했습니다. 유교 경전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해석하고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전국의 서당과 향교에서 교재로 사용되어 유학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세종 8년에는 음악 이론서인 "악학궤범"의 기초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종은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음악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백성들의 정서를 순화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현전 학사들은 중국과 조선의 음악 이론을 연구하고, 새로운 악기를 개발하는 일에도 참여했습니다.
집현전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이었습니다. 세종 25년에 공식 발표되는 훈민정음이지만, 그 기초 작업은 집현전 설치 직후부터 비밀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세종은 집현전의 핵심 학사들과 함께 밤낮으로 새로운 문자를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집현전 운영이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일부 신하들은 집현전 학사들이 너무 많은 혜택을 받는다고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세종 10년, 한 신하가 상소를 올렸습니다. "전하, 집현전 학사들은 실무는 하지 않고 책만 읽습니다. 그들에게 주는 급료로 몇 명의 관리를 더 뽑을 수 있습니다. 집현전을 축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세종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당장 쓸모있어 보이는 일만 하면, 나라의 미래는 없다. 학문은 백 년을 내다보고 투자해야 하는 것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지금 연구하는 것들이 당장은 쓸모없어 보일지 몰라도, 먼 훗날 조선의 큰 자산이 될 것이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는 집현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세종 12년,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는 연구와 공부가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을지 모르나, 반드시 백성들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부디 계속 정진하여 훌륭한 학자가 되어주십시오." 집현전 학사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임금이 자신들을 이토록 믿고 지원해주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 안정된 왕권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
세종 즉위 후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은 눈에 띄게 안정되어 갔습니다. 태종이 다져놓은 튼튼한 기반 위에서 세종의 현명한 통치가 더해지자, 나라는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세종은 강압적인 방법이 아니라, 덕으로 왕권을 확립했습니다.
세종의 왕권 확립 방식은 아버지 태종과는 달랐습니다. 태종은 강력한 힘으로 반대파를 제거하며 왕권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포용과 설득으로 신하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세종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신하라도 그 뜻을 존중했고,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세종 10년의 한 기록을 보면, 세종의 이러한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어느 날 조정 회의에서 한 정책에 대해 신하들의 의견이 둘로 갈렸습니다. 세종은 양쪽의 의견을 모두 들은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분의 의견이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니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우선 한쪽 방식으로 일 년간 시행해보고, 결과를 보아 더 좋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하들은 세종의 지혜로운 절충안에 감탄했습니다. 무조건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을 통해 더 나은 방법을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종은 신하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이끌어냈습니다.
세종 12년부터는 국방에도 큰 신경을 썼습니다.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자주 국경을 침범했고, 남쪽에서는 왜구가 해안을 괴롭혔습니다. 세종은 무력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세종은 이중 전략을 펼쳤습니다. 첫째,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어 침략자들을 막았습니다. 최윤덕, 이천 같은 명장들을 파견하여 북방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사민을 개척했습니다. 남쪽으로는 이종무 장군을 보내 대마도를 정벌했습니다. 둘째, 외교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여진족의 추장들을 회유하여 조선에 귀순하게 하고, 일본과는 제한적인 무역을 허용하여 왜구를 줄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세종 15년이 되자, 북방과 남방 모두 안정을 찾았습니다. 백성들은 더 이상 침략의 위협에 떨지 않아도 되었고,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세종 16년, 세종은 과학기술 진흥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장영실이라는 천재 기술자를 발탁하여 다양한 과학 기구를 만들게 했습니다. 측우기, 자격루, 해시계, 천체 관측 기구 등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측우기는 세계 최초로 강수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기구였습니다.
신하들 중에는 "이런 것들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확고했습니다. "농사는 날씨에 달려 있고, 날씨를 정확히 알려면 과학이 필요하다. 이것은 백성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다." 실제로 측우기를 통해 강수량을 기록하자, 농사 계획을 더 정확하게 세울 수 있었고, 가뭄과 홍수에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 18년, 세종은 의학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향약집성방"이라는 의학서를 편찬하게 했습니다. 이 책은 조선에서 자라는 약초들을 이용한 치료법을 정리한 것으로, 귀한 중국 약재가 없어도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세종은 "백성들이 병들었을 때 비싼 중국 약을 구하지 못해 고통받는 것을 볼 수 없다"며 이 작업을 독려했습니다.
세종 20년이 되자, 조선은 완전히 안정된 국가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세금 부담이 줄어 생활이 나아졌고, 전쟁의 위협도 사라졌습니다. 학문과 예술이 발전했고, 과학기술도 크게 진보했습니다. 무엇보다 백성들은 임금을 믿고 따랐습니다.
세종실록 20년의 한 기록을 보면, 지방에서 올라온 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전하를 성군이라 칭송하며, '우리는 복이 많아 이런 훌륭한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길거리에서 어린아이들도 전하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 보고를 받은 세종은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이는 모두 신하들과 백성들의 협력 덕분이다. 나 혼자의 공이 아니다."
세종 25년, 마침내 훈민정음이 반포되었습니다. 이는 세종이 즉위 후 오랫동안 준비해온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 모든 백성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훈민정음 서문에서 세종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이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이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 짧은 글 속에 세종의 애민 정신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들의 삶을 편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바로 세종이 평생 실천한 정치의 핵심이었습니다.
세종 32년인 1450년, 세종은 쉰넷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세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통곡했습니다. 장례 행렬이 지나갈 때 수많은 백성들이 길가에 나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임금님은 진정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셨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세종의 재위 32년은 조선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였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모든 분야에서 놀라운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무엇보다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세종 즉위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스물두 살의 젊은 임금이 왕위에 올라 애민 정치를 실천하고, 학문을 진흥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면서 위대한 시대의 기초를 닦았던 것입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은 세종대왕의 즉위와 초기 치세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셋째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될 생각이 없었던 충녕대군이 어떻게 조선 최고의 성군이 되었는지 보셨습니다. 학문을 사랑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세종을 위대하게 만든 힘이었습니다. 애민 정치, 집현전 설치, 안정된 왕권 확립, 이 모든 것이 훗날 한글 창제로 이어지는 찬란한 업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억하지만, 그 시작이 얼마나 겸손하고 진실했는지도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세종의 또 다른 위대한 업적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립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