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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의빈 성씨, 신분을 뛰어넘은 조선 최고의 신데렐라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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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00자)
한 나라의 지존, 가장 완벽했던 군주 정조. 그의 마음을 훔친 것은 명문가의 규수가 아닌, 미천한 신분의 궁녀였습니다. 왕의 사랑을 두 번이나 거절했던 유일한 여인. 신분의 벽을 넘어 역사가 된 그들의 사랑, 정조는 왜 그토록 그녀를 원했을까요?
디스크립션 (300자)
엄격한 규율과 신분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의 궁궐. 그곳에서 왕과 궁녀라는, 결코 허락될 수 없는 사랑이 피어납니다. 고독한 군주 정조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궁녀 성덕임. 왕의 여자가 되기보다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그녀는 두 번이나 그의 마음을 거절하지만, 운명은 결국 두 사람을 하나로 묶습니다. 비극적이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조선 최고의 신데렐라 의빈 성씨의 드라마 같은 삶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동궁전의 어린 세손과 글을 베껴 쓰는 어린 궁녀.
1762년, 창경궁 동궁전의 한적한 서고. 겹겹의 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궁궐의 심장부였지만, 이곳만큼은 시간의 흐름이 더딘 듯 고요했다. 열 살 남짓의 어린 세손 이산(훗날의 정조)은 탕건을 벗어둔 채 높은 서가에 기대앉아 있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뒤, 그는 할아버지 영조의 엄격한 가르침 아래 하루하루를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의 눈빛은 또래의 천진함 대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서늘한 총기로 가득했다. 왕의 후계자라는 자리는 화려했지만, 동시에 가장 외로운 자리였다.
그때, 사각거리는 소리가 그의 정적을 깨뜨렸다. 고개를 돌리자, 저쪽 구석 책상에 앉아 조그만 손으로 붓을 놀리는 어린 궁녀, 생각시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이는 그와 비슷해 보였다. 동궁전의 나인들이 읽을 <곽장양문록>을 필사하는 중이었다. 보통의 생각시들이라면 세손의 존재를 의식하고 바짝 얼어붙었을 테지만, 그 아이는 오직 책과 붓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 당돌함에 흥미가 동한 이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소녀의 이름은 성덕임. 아직 앳된 얼굴이었지만,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글씨에는 힘이 있었다. 이산은 그녀가 잘못 쓴 글자를 발견하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 글자가 아니다. ‘넘칠 람(濫)’ 자를 써야 할 곳에 ‘볼 감(監)’ 자를 썼구나.”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덕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바로 눈앞에 세손 이산이 서 있었다. 덕임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세손 저하!”
하지만 이산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이 아닌, 그녀가 방금 전까지 필사하던 종이에 머물러 있었다. “글씨체는 반듯하나, 아직 배움이 짧은 모양이구나. 이리 와보거라.” 그는 덕임을 자신의 책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직접 붓을 들어 방금 그녀가 틀렸던 글자를 써 보였다. 그의 손에서 그려지는 글자는, 먹으로 피어나는 한 송이 난초처럼 기품 있고 힘이 넘쳤다. 덕임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찌하여 책을 필사하는 것이냐?” 이산의 물음에 덕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인들께서 이야깃거리를 원하시는데, 책이 귀하여… 소인이 필사하여 돌려 읽고 있사옵니다.” “책이 귀하다….” 이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궁궐 안에서도 신분에 따라 지식의 기회조차 차별받는 현실. 그는 자신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고독감을 이 어린 궁녀에게서 보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성덕임이라 하옵니다.” “덕임이라… 기억해두마.” 이산은 무심한 듯 말했지만, 그의 눈은 깊은 흥미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여사서>였다. “이 책을 다 읽고, 그 뜻을 깨치는 날 다시 나를 찾아오너라. 그때는 상을 내릴 것이다.” 덕임은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받아 들었다. 그것은 세손의 첫 번째 명령이었고, 두 사람의 운명을 엮는 첫 번째 끈이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세손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그날 이후, 덕임은 밤마다 호롱불 아래서 <여사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기회’라는 것을 준, 그 고독한 소년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절대 권력의 왕이 된 정조.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할아버지 영조가 승하하고, 세손 이산은 수많은 정적들의 위협을 뚫고 마침내 용상에 올랐다.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 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왕이 된 그는 더욱더 고독해졌다. 신하들은 그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지만, 그 누구도 마음을 나누려 하지는 않았다. 개혁을 향한 그의 의지가 강할수록, 보이지 않는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밤늦도록 정무에 시달리던 그는 텅 빈 서고에 홀로 앉아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 기억의 한편에는 늘, 붓을 쥐고 있던 당돌한 궁녀, 성덕임이 있었다.
그는 수소문 끝에 덕임이 여전히 궁에 남아, 자신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처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어엿한 궁녀가 된 그녀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앳된 소녀는 어느새 고운 자태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수많은 궁녀들 속에서도, 그녀는 유독 조용하고 총명하게 빛났다. 정조는 결심했다. 이 삭막한 궁궐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 자신의 진짜 모습을 기억해 줄 사람. 그는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왕으로서가 아닌, 한 사내로서.
어느 달 밝은 밤, 정조는 덕임을 자신의 거처인 동덕당으로 불렀다. 왕의 부름을 받은 덕임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서자, 정조는 모든 시중을 물리치고 그녀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덕임은 고개를 숙인 채 왕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정조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오랜만이구나, 덕임아.” 그 한마디에 덕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덕임아’. 왕이 궁녀의 이름을 이토록 다정하게 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는… 나의 후궁이 되어라.” 정조의 말은 명령이었지만, 그 안에는 간절한 바람이 섞여 있었다. 덕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미천한 궁녀인 자신을 후궁으로 삼겠다니. 그것은 하늘이 내리는 은총이자, 모든 궁녀가 꿈꾸는 신분 상승이었다. 하지만 덕임의 마음은 기쁨보다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왕의 여자가 된다는 것. 그것은 곧 자신의 삶을 버리고, 오직 왕만을 위해 존재하는 새장 속의 새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후궁들의 시기와 암투, 보이지 않는 정치적 음모 속에서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길이었다.
덕임은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단호했다. “전하… 송구하오나, 그 명은 따를 수 없사옵니다.” 정조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감히 일개 궁녀가, 왕의 명을 거역한 것이다. 방 안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이유를 말해보거라.” “소인은… 그저 지금처럼 전하의 곁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살고 싶을 뿐이옵니다. 후궁의 자리는 소인에게 너무나 과분하고, 또한 감당할 수 없는 자리이옵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정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그림자가 그녀의 작은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엎드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것은 나의 명이다. 너에게는 거부할 권리가 없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스치자 덕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절대 권력자의 위압감과 한 남자의 집요한 욕망이 그녀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그녀의 마지막 대답은, 죽음으로 자신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정조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동시에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감정이 솟구쳤다. 자신을 거부한 최초의 여인. 그녀가 더욱더, 미치도록 갖고 싶어졌다.
※ 정조의 끊임없는 관심과 집요한 구애.
첫 번째 거절 이후, 궁궐의 시간은 덕임에게 유독 잔인하게 흘러갔다. 왕의 은혜를 거절한 궁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다른 궁녀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죄인이 되었다. 노골적인 비난과 따가운 시선 속에서 그녀는 숨 막히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가장 괴롭힌 것은, 왕의 변함없는 시선이었다. 정조는 그녀를 벌하지도, 내치지도 않았다. 그저 멀리서, 하지만 끈질기게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혜경궁의 처소에 문안 인사를 들일 때면, 그의 눈길은 언제나 덕임에게 머물렀다. 그 눈빛은 때로는 애틋했고, 때로는 원망스러웠으며, 때로는 뜨거운 소유욕으로 번뜩였다. 덕임은 그 시선을 피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정조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덕임은 왕이 자신을 잊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제는 평범한 궁녀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미한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착각일 뿐이었다. 어느 날 밤, 덕임은 다시 동덕당으로 불려갔다. 1년 전 그날과 똑같은 방, 똑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정조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그는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고,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
“그간… 편히 지냈느냐?” 다정한 물음이었지만, 덕임은 편히 지냈노라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하자, 정조는 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편치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나를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데, 하물며 나의 명을 거역한 너는 오죽했겠느냐.”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을 고통과 외로움을. “허나 덕임아, 나는 너를 벌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네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덕임의 마음이 흔들렸다. 어쩌면 이 사내를 믿어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 사내의 곁이라면, 새장 속의 새가 아닌, 함께 하늘을 나는 동반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왕의 후궁으로 살다 쓸쓸히 죽어간 수많은 여인들의 비극적인 삶이 스쳐 지나갔다. 사랑은 변하고, 권력은 비정했다. “전하의 마음은 감사하오나… 소인은 아직….”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정조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너는 아직도 두려운 것이냐. 내가 너를 다른 여인들처럼 대할까 봐? 사랑이 식고 나면, 너를 헌신짝처럼 버릴까 봐?”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섰다. 그리고는 덕임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려,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눈은 깊고 검은 심연과도 같았다. 그 눈동자 안에 오직 자신만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 덕임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다시는 묻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너의 대답을 듣고 싶구나.”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떨리는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야릇한 감촉에 덕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대로 그의 뜻을 따르면, 모든 것이 편해질 터였다. 하지만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왕의 권위와 한 남자의 욕망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 사내를 파멸시키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 안에서 자신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덕임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것이 그녀의 두 번째 거절이었다. 정조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알겠다. 네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그의 목소리에 덕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죽음이 닥쳐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모시는 생각시 하나를… 내일 당장 출궁시키도록 하겠다.”
“전하!” 덕임은 경악했다. 자신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아이가 쫓겨나게 된 것이다. “왜 저를 벌하지 않으시고….” “너는 벌을 받아도 싸지만, 나는 너를 내 손으로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 허니, 네가 아끼는 사람을 통해 너의 죄를 묻는 것이다. 내일도 너의 대답이 같다면, 모레는 또 다른 이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네가 너의 고집으로 몇 명이나 불행하게 만들 수 있을지, 나도 궁금하구나.” 그것은 왕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도 집요한 협박이었다. 정조는 끝내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덕임은 차가운 방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 정조의 진심과 고독을 깨닫게 된 덕임.
왕의 가장 잔인한 협박은, 덕임의 마지막 자존심과 자유 의지를 산산조각 냈다. 자신 때문에 죄 없는 동료가 쫓겨나고, 또 다른 누군가가 고통받을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제 심장을 도려내는 것이 나았다. 그녀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왕의 집요한 사랑과 권력 앞에서, 그녀가 지키려 했던 소박한 삶의 꿈은 한낱 먼지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그날 밤, 덕임은 스스로 정조의 침전으로 향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사지로 향하는 죄수처럼 무겁고 위태로웠다.
침전의 문을 열자, 그는 창가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빛을 등진 그의 얼굴은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만으로도 그의 기다림이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덕임은 말없이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고 있던 저고리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거절도, 애원도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한 항복이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맹세였다.
정조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옷고름을 풀던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그의 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리 하는 것이냐. 너의 마음이 아닌, 나의 협박 때문에 너를 내게 주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덕임은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더 이상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전하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허니, 더는 소인 때문에 다른 이를 아프게 하지 마시옵소서.”
그 대답에, 정조는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지만, 이런 방식의 굴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온전한 사랑을 원했다. 그는 덕임의 여린 어깨를 붙잡고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등 뒤의 차가운 벽과 그의 뜨거운 몸 사이에 갇힌 덕임은 숨을 헐떡였다. “정녕 후회하지 않겠느냐. 한번 나의 여자가 되면, 너는 다시는 너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평생을 이 궁궐 안에서, 나만 바라보며 살아야 한단 말이다.”
덕임은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로 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넜습니다. 전하의 세상이, 이제는 소인의 세상이겠지요.” 체념 섞인 그녀의 속삭임은, 정조의 마지막 이성의 끈을 끊어버렸다. 그는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그동안의 기다림과 애탐, 원망과 소유욕이 뒤섞인 키스였다. 덕임은 저항하지 않고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눈물이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와 짠맛이 느껴졌다.
정조는 그녀를 안아 올려 침상으로 향했다. 하얀 비단 이불 위로 그녀의 몸을 눕히고, 그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물에 젖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애처로우면서도, 참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는 그녀의 눈물 맺힌 속눈썹에 입을 맞추고, 귓불을 부드럽게 핥았다.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두려우냐.” “……무섭습니다.” “허나, 나는 너를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사랑만 줄 것이다.” 그는 속삭이며 그녀의 소복을 천천히 벗겨냈다. 드러난 그녀의 새하얀 살결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그는 경건한 순례자처럼, 그녀의 목덜미와 쇄골, 그리고 봉긋한 가슴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덕임은 그의 손길 아래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과 함께,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어떤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고독하고 강인한 사내에 대한 연민, 그리고 사랑.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단단한 등을 감쌌다. 그녀의 작은 반응에, 정조는 더욱 깊고 뜨겁게 그녀를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몸이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 덕임은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고통과 쾌감의 경계에 있는, 생경한 감각이었다. 정조는 그녀의 귓가에 쉴 새 없이 사랑을 속삭이며, 부드럽고 또 격정적으로 움직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만을 부르며 낯선 쾌락의 바다를 함께 헤엄쳤다. 마침내 절정의 순간, 그들은 서로를 부서져라 껴안았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의 결합이 아니었다. 왕과 궁녀라는 신분의 벽을 넘어, 두 개의 외로운 영혼이 비로소 하나가 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의식이었다.
※ 원자(문효세자)를 낳고 의빈으로 책봉된 덕임.
그날 밤 이후, 성덕임은 정식으로 왕의 승은을 입은 후궁, ‘상궁 성씨’가 되었다. 그녀의 거처는 왕의 침전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고, 그녀를 대하는 궁인들의 태도도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하지만 덕임은 여전히 예전처럼 조용하고 겸손했다. 화려한 비단옷이나 값비싼 장신구를 탐하지 않았고,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조용히 왕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오히려 정조로 하여금 그녀를 더욱 깊이 사랑하게 만들었다.
정조에게 덕임의 처소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치열한 정쟁과 무거운 국정의 짐을 내려놓고, 오직 한 사내로 돌아갈 수 있는 곳. 그는 밤늦도록 정무를 본 뒤에도 거의 매일같이 그녀를 찾았다. 때로는 지친 몸을 그녀의 무릎에 누인 채 잠이 들기도 했고, 때로는 어린 시절처럼 나란히 앉아 책을 읽으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덕임은 왕의 여인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고, 스승이었으며, 어머니였다. 그녀는 정조의 고독을 이해했고,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었다.
“오늘은 또 어떤 신하가 과인의 속을 뒤집어 놓았는지 아시오? 개혁을 논하자니 수구세력이라 반대하고, 탕평을 말하자니 붕당의 이익만 챙기려 드니… 이 나라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정조가 한탄을 늘어놓으면, 덕임은 따뜻한 차를 건네며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전하. 큰 나무는 바람을 많이 타는 법이라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크고 높기에, 그만큼 반발도 거센 것이겠지요. 허나 백성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누가 진정으로 자신들을 위하는 왕인지를요.” 그녀의 지혜로운 위로에, 정조는 다시 국정을 이끌어갈 힘을 얻곤 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덕임이 회임을 한 것이다. 정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국정의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그녀의 처소를 찾아, 점점 불러오는 그녀의 배에 귀를 대고 태아의 소리를 듣곤 했다. “우리 아기가… 아비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냐.” 그의 얼굴에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평범한 아버지의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1782년 가을, 덕임은 마침내 옥동자를 낳았다. 정조의 첫아들이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궁궐에 울려 퍼지는 순간, 정조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아들의 탄생과 함께, 덕임은 종3품 ‘소용’을 거쳐 정3품 ‘의빈’으로 책봉되었다. ‘의(宜)’는 ‘화목하고 용모가 아름답다’는 뜻으로, 정조가 직접 그녀를 위해 고른 글자였다. 이제 그녀는 명실상부한 왕의 후궁이자, 장차 이 나라의 국본이 될 원자의 생모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와 정조의 행복은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 의빈을 향한 왕의 끝없는 총애는, 다른 후궁들과 중전인 효의왕후 측의 시기와 질투에 불을 지폈다. 특히, 아직 후사가 없던 효의왕후의 처소에서는 의빈과 원자를 저주하는 흉흉한 소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덕임은 애써 그 모든 것을 외면하려 했지만, 거대한 궁궐의 암투 속에서 비극의 그림자는 이미 그녀의 행복 뒤편에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 아들의 죽음, 그리고 뒤따른 그녀의 죽음.
행복은 짧았다. 의빈 성씨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은, 가장 깊은 비극의 서막일 뿐이었다. 1786년, 다섯 살의 어린 나이였던 문효세자가 갑자기 홍역에 걸려 쓰러졌다. 당시 홍역은 아이들에게는 사신과도 같은 병이었다. 정조는 모든 국정을 중단하고 아들의 곁을 지켰다. 당대 최고의 의원들이 모두 불려왔지만, 어린 세자의 병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정조는 애가 타는 심정으로 하늘에 기도했지만, 운명은 냉혹했다. 문효세자는 앓기 시작한 지 며칠 만에, 아버지의 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들의 죽음은 의빈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으로 아들의 이름만 부르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정조는 슬픔에 잠긴 아내를 필사적으로 위로했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은 아들을 따라 저세상으로 떠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그녀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극심한 슬픔과 스트레스는 그녀의 몸을 빠르게 쇠약하게 만들었다.
문효세자가 죽은 지 불과 넉 달 뒤, 의빈 성씨는 출산을 앞두고 병상에 몸져누웠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정조의 손을 잡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전하… 이제 곧 우리 아기 곁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부디 소인을 잊고 성군이 되시옵소서.” 정조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절규했다. “안 된다! 내가 너를 이리 보낼 수는 없다! 제발… 나를 두고 가지 마라, 덕임아!” 하지만 그녀의 숨은 점점 가빠져 갔고, 마침내 그녀는 정조의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뱃속의 아이와 함께였다. 그녀의 나이, 불과 서른넷이었다.
사랑하는 아들과 평생의 정인이었던 아내를 한 해에 모두 잃은 정조의 슬픔은, 한 나라의 군주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컸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의빈의 시신을 붙잡고 며칠 밤낮을 울부짖었다. 그녀의 장례는 국장과 다름없이 치러졌고, 정조는 직접 그녀의 묘지명을 지었다. ‘아, 너의 근원을 생각하면 나와 동궁의 옛 동료인데… 너를 빈으로 맞이한 것이 내 본의가 아니었지만, 운명에 따라 결국 그리 되었구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꿈만 같다.’ 그의 글에는 그녀를 향한 절절한 사랑과 후회, 그리고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후로 정조는 다시는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그는 의빈이 쓰던 처소를 그대로 보존하게 하고, 그녀의 물건들을 곁에 둔 채 평생을 그녀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는 신하들에게 “의빈이 죽은 뒤로는 진정한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신분을 뛰어넘어 왕의 유일한 사랑을 받았던 궁녀 성덕임. 그녀는 비록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조선 최고의 군주였던 정조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사랑으로 남았다. 그녀의 죽음으로, 정조의 시간 역시 멈춰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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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여인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궁녀 성덕임. 그리고 그런 그녀를 끝까지 사랑하며, 평생을 그리워했던 군주 정조. 신분의 벽을 넘었던 그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얼마나 깊이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역사 속에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조금 다른 사랑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야 했던 한 남자. 하지만 그는 왕좌를 포기하는 대신, 사랑하는 아내와의 평온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권력보다 사랑이 더 소중했던 남자의 이야기, 【정종과 정안왕후】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