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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변장해 살아본 저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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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저승의 법칙만을 따르던 저승사자가 우연히 인간 세상에서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판타지 이야기. 냉정했던 저승사자의 마음이 따뜻해지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깨닫게 되는 특별한 여정을 그립니다.
실수한 저승사자
저승의 차가운 새벽, 갈색 도포를 입은 저승사자 진혼이 생사부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삼천 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던 그였지요.
"오늘도 열두 명... 모두 정확한 시간에 데려가야 하겠군."
진혼은 명단을 확인하며 중얼거렸습니다. 그의 손끝에서 차가운 푸른빛이 일었습니다.
"첫 번째, 새벽 네 시 삼 분, 김복동 할머니... 자연사."
"두 번째, 새벽 네 시 십오 분, 박서준 어린이... 교통사고."
진혼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메마르게 울렸습니다. 죽음은 그저 규칙일 뿐, 슬픔도 연민도 필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마지막 명단을 확인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열두 번째, 밤 열한 시 사십구 분, 이하연... 어, 이게 뭐지?"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생사부의 글자가 갑자기 흐려지더니, 먹물이 번진 것처럼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럴 수가... 삼천 년 만에 처음 보는 일인데..."
진혼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저승사자의 생사부는 절대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책이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어서 가서 확인해봐야 해."
진혼은 서둘러 인간 세상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어쩐지 평소와 달리 불안했습니다.
서울의 한 작은 골목, 이하연이라는 소녀의 집 앞에 도착한 진혼. 그런데 이상한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평소라면 보였어야 할 죽음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치더니, 진혼의 몸이 붕 떴다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있던 저승사자의 날이 반짝이며 사라져버렸습니다.
"안 돼... 이럴 순 없어!"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저승의 법칙을 어긴 대가로, 진혼은 당분간 인간 세상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으로의 변신
새벽녘, 진혼은 길거리 벤치에 앉아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습니다. 검은 도포는 사라지고, 대신 청바지와 흰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요.
"이게 대체... 어, 으악!"
처음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진혼이 깜짝 놀랐습니다. 차갑고 威嚴있던 저승사자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평범한 청년의 목소리가 나온 것입니다.
"배가... 배가 왜 이러지?"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배에서 났습니다. 꼬르륵, 꼬르륵... 삼천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지요.
"아, 이게 바로 인간들이 말하는 배고픔인가?"
마침 길 건너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습니다. 붕어빵 장수 아저씨가 새벽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지요.
"저... 그게... 하나만 주시겠습니까?"
진혼이 어색하게 말을 걸었습니다. 평소라면 그저 영혼을 데리러 왔다고 냉정하게 말했겠지만, 지금은 달랐습니다.
"오늘 첫 손님이네! 하나 더 서비스로 드릴게."
아저씨가 붕어빵을 건네자, 진혼은 조심스레 한 입 베어물었습니다.
"어... 어어... 어어어!!!"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하고 따뜻한 맛에 진혼의 눈이 커졌습니다. 삼천 년 동안 맛본 적 없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지요.
"이렇게나 맛있는 것을... 그동안 인간들의 영혼만 데리러 다녔다니..."
붕어빵을 다 먹고 난 진혼은 손가락에 묻은 설탕을 하나하나 핥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발견했지요.
"아... 인간들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건가?"
진혼은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재빨리 내렸습니다. 이제부터 배워야 할 게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어디서 살아야 하지?"
주머니를 뒤져보니 작은 지갑이 있었고, 그 안에는 월세 계약서가 들어있었습니다. 저승에서 그를 인간 세상에 보낼 때 최소한의 준비는 해준 모양이었지요.
이웃과의 만남
계약서에 적힌 주소를 찾아 도착한 곳은 오래된 다세대 주택이었습니다. 진혼은 어색하게 자신의 방 문을 열었습니다.
"이게 전부인가..."
방 안은 작았지만 깨끗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몰라 그저 서 있기만 했지요.
"어머, 새로 이사 오셨나요?"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옆집 할머니였습니다. 저승사자였을 때라면 그녀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부터 확인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아... 네..."
"혼자 사시나 보네요. 식사는 하셨어요?"
진혼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침에 먹은 붕어빵이 전부였지요.
"아이고, 그럼 안 되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할머니는 재빨리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후 따끈한 된장찌개와 반찬을 들고 나왔습니다.
"처음 혼자 살다 보면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죠. 오늘은 이거라도 먹고, 내일 장 보러 갈 때 같이 가요."
진혼은 할머니의 친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승에서는 이런 걸 배운 적이 없었거든요.
"...감사합니다."
된장찌개 한 숟가락을 떠먹는 순간, 진혼의 눈이 커졌습니다. 붕어빵과는 또 다른 맛이었지요.
"맛있죠? 나중에 끓이는 법도 가르쳐 줄게요."
할머니는 진혼이 어설프게 숟가락질 하는 모습을 보며 따뜻하게 미소지었습니다.
"이름이 뭐예요?"
"진... 진우라고 합니다."
급하게 지어낸 이름이었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진우씨,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이웃사촌이라고, 서로 돕고 살아야지."
그 순간, 진혼의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승에서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감정이었습니다.
생명의 소중함
비가 내리던 어느 저녁, 진혼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골목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야옹..."
쓰레기봉투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울음소리. 진혼은 잠시 멈춰 섰습니다.
"죽어가는 소리군..."
저승사자의 습관이 남아있었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 소리가 자꾸만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습니다.
"이상하네...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결국 진혼은 쓰레기봉투 뒤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비에 젖은 채 떨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죽겠군..."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고양이가 그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까만 눈동자에는 생명의 의지가 가득했지요.
"이럴 순 없는데..."
진혼은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고양이를 들어올리는 순간, 작은 생명의 온기가 그의 손바닥에 전해졌습니다.
"따... 따뜻하네."
집으로 돌아온 진혼은 수건으로 고양이의 몸을 닦아주었습니다. 옆집 할머니가 준 우유를 데워서 먹이기도 했지요.
"살려고 이렇게나 애쓰는구나..."
마른 수건 위에서 잠든 고양이를 바라보며 진혼은 생각했습니다. 전에는 그저 '수명이 다한 영혼'으로만 보았던 죽음이, 이제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이런 생명들의 끝을 지켜보는 일을 했었지..."
문득 그동안 자신이 데려간 수많은 영혼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들 모두가 이렇게 살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야옹..."
잠에서 깬 고양이가 진혼의 무릎 위로 올라왔습니다. 작은 온기가 그의 차가운 마음을 녹이기 시작했지요.
"네 이름은... 생명이라고 할까?"
진혼의 입가에 처음으로 따뜻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인간의 따뜻함
어느 일요일 아침, 옆집 할머니가 진혼을 찾아왔습니다.
"진우씨, 오늘 우리 동네 김장하는 날이야. 같이 가요."
"김장이요...?"
저승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진혼은 골목 안 작은 마당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손놀림이 야무지네!"
동네 아주머니들이 칭찬하자 진혼은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사실 매일 밤 인터넷으로 김장 하는 법을 연습했던 것입니다.
"우리 진우씨, 처음엔 물도 못 끓였는데 이제 제법이야."
옆집 할머니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할머니! 김치 좀 가져가세요!"
건너편 반찬가게 아저씨가 큰 통을 들고 나왔습니다.
"아니, 이렇게 많이..."
"할머니가 평소에 얼마나 도와주셨다고요. 당연한 거죠."
그러자 옆집에서도, 또 그 옆집에서도 서로 나눠주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김치, 떡, 과일... 마당은 금세 잔칫집처럼 변했지요.
"나눠 먹어야 더 맛있는 거야."
할머니의 말에 진혼은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승에서는 모든 것이 규칙과 계산이었는데, 여기서는 서로 나누는 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진우씨도 이거 가져가요. 혼자 사는 사람이 끼니 거르면 안 돼."
이웃들이 건네는 반찬통을 받으며 진혼의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그의 품에 안긴 '생명이'도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애교를 부렸지요.
"고... 고맙습니다."
말을 더듬으며 인사하는 진혼을 보며 사람들이 웃었습니다.
"우리가 다 가족인데 뭘!"
그 말에 진혼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가족... 저승에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그 따뜻한 단어가 그의 마음을 적셨습니다.
특별한 만남
어느 날, 진혼은 골목길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한 소녀가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기... 거기에 그림을 그리면..."
진혼이 말을 걸려는 순간, 소녀가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아저씨도 이 그림 보러 오셨어요? 제가 이 동네를 더 예쁘게 만들고 있거든요!"
그때였습니다. 진혼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저승사자의 직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소녀의 머리 위로 희미하게 보이는 생명의 실이, 곧 끊어질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뭐니?"
"하연이에요! 이하연! 근데 아저씨는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이세요?"
진혼은 놀랐습니다. 그날 밤 실수로 데려가지 못했던 그 소녀였던 것입니다.
"난... 진우라고 해."
"진우 아저씨, 제 그림 어때요? 전 커서 화가가 될 거예요!"
하연이의 그림은 서툴렀지만 밝고 따뜻했습니다. 골목길 담벼락에 그려진 꽃과 나비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쁘구나..."
"하연아! 약 먹을 시간이야!"
멀리서 하연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앗, 벌써 시간이... 아저씨 내일도 여기서 만나요! 제가 더 예쁜 그림 그려올게요!"
하연이는 활짝 웃으며 달려갔습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진혼의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삼 개월... 저 아이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삼 개월..."
처음으로 진혼은 자신이 가진 저승사자의 지식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저 밝은 미소가, 저 꿈 많은 아이가, 곧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의 변화
다음 날부터 진혼은 매일 하연이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진혼은 그 옆에서 물감을 건네주었지요.
"진우 아저씨, 이 꽃 봐요! 우리 엄마를 위해 그린 거예요."
하연이의 그림 속 꽃들은 날이 갈수록 더 생기 있게 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소녀의 생명줄은 점점 가늘어져 갔습니다.
"하연아... 병원은 잘 다니고 있니?"
"네! 근데 저는 아프지 않아요. 그냥 가끔 피곤할 뿐이에요."
순수한 미소를 짓는 하연이를 보며 진혼의 마음이 찢어질 듯했습니다. 저승사자였던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연이의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저씨, 우리 다음에는 놀이공원에 가요! 제가 한 번도 못 가봤거든요."
그날 밤, 진혼은 자신의 방에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생명이'가 그의 무릎을 부비며 갔지만, 평소처럼 쓰다듬어주지도 못했습니다.
"내가...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마침내 결심을 한 진혼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움직였습니다. 동네 이곳저곳을 다니며 하연이의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지요.
"이 그림들을 전시회에서 보여주면 어떨까요?"
"하연이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말을 걸던 진혼이었지만, 하연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우리 가게 벽면을 써도 좋아!"
"우리 카페에서 전시회를 열면 어떨까요?"
이웃들의 마음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진혼은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이 모이면 이런 기적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난 더 이상... 그저 죽음을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아닌가 봐..."
그날 밤, 진혼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차갑던 손끝에 이제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습니다.
시련의 순간
전시회를 준비하던 어느 날, 하연이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진혼은 달려가 소녀를 안았습니다.
"하연아! 정신 차려!"
병원으로 실려 가는 구급차 안에서, 진혼은 하연이의 생명줄이 더욱 가늘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진우 씨... 하연이가..."
하연이 어머니가 병원 복도에서 울고 계셨습니다. 진혼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안아주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괜찮을 거예요... 분명..."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저승사자였기에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연이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진우... 아저씨..."
의식을 차린 하연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우리... 전시회는... 어떻게 됐어요?"
진혼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습니다. 삼천 년을 살면서 한 번도 흘려본 적 없는 눈물이었습니다.
"다... 다 준비됐어. 네가 그린 그림들이 마을 전체를 환하게 만들었어."
"다행이다... 제 그림으로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하연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습니다. 진혼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전처럼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안 돼... 이대로는..."
진혼의 머릿속에서 저승의 법칙들이 울렸습니다.
'모든 생명에는 정해진 수명이 있다.'
'그 누구도 생명의 줄을 바꿀 수 없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하지만 진혼의 마음속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 아이는 달라...'
병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습니다. 하연이의 생명줄이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었지요.
결단의 시간
병실 창가에 달빛이 스며들었습니다. 진혼은 잠든 하연이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제... 결정할 시간이군."
진혼의 손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일었습니다. 인간의 모습이 되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아직 저승사자의 힘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삼천 년 동안 지켜온 법칙... 그걸 어기면 영원히 저승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때, 하연이가 꿈속에서 중얼거렸습니다.
"아저씨... 전시회에 꼭 가고 싶어요... 제 그림으로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어요..."
진혼의 손이 떨렸습니다. 푸른빛이 깜빡거렸지요.
"이러면 안 돼... 이건 세상의 이치야..."
하지만 그의 눈앞에 지난 날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붕어빵의 달콤함을 처음 알았던 순간, 할머니의 된장찌개에 감동받았던 날, 길고양이 '생명이'를 품에 안았던 때... 그리고 하연이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웃었던 시간들...
"이게... 정말 세상의 이치일까?"
진혼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고동, 그것은 바로 인간의 심장이었습니다.
"나는... 결정했다."
진혼의 손에서 푸른빛이 강하게 타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줄을 끊어 하연이에게 이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찾은 답이야."
순간 천둥이 울렸고, 진혼의 몸이 붕 떴다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의 몸에서 저승사자의 힘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난... 정말 인간이 되는 건가..."
창밖에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하연이의 얼굴에 건강한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녀의 생명줄은 다시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깨달음
하연이의 전시회 날,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골목길 담벼락마다 하연이의 그림이 걸렸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진우 아저씨, 보세요! 제 그림을 보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웃고 있어요!"
건강을 되찾은 하연이가 진혼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더 이상 저승사자의 눈으로 보이던 가는 생명줄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소녀의 생기 넘치는 모습이 그의 눈에 가득했습니다.
"하연아, 저기 봐. 할머니도 오셨네."
옆집 할머니가 된장찌개를 들고 오셨고, 동네 주민들도 저마다 음식을 가져왔습니다. 길고양이 '생명이'도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다녔지요.
"이게 바로 삶이구나..."
진혼은 중얼거렸습니다. 저승에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작지만 소중한 행복들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진우씨, 우리 하연이 그림 정말 대단하죠?"
"맞아요, 이렇게 밝고 따뜻한 그림은 처음 봤어요."
마을 사람들의 칭찬에 하연이가 쑥스러운 듯 진혼의 뒤로 숨었습니다.
"아저씨... 제가 그린 마지막 그림을 보여드릴게요."
하연이가 조심스레 캔버스를 내밀었습니다. 그림 속에는 진혼과 하연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웃고 있었습니다. 그림 위로 무지개가 걸려있었고, 제목은 '우리 가족'이었습니다.
"이게... 내가 찾은 답이었구나."
진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차가운 저승사자의 눈물이 아닌, 따뜻한 인간의 눈물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귀환
전시회가 끝난 늦은 밤, 진혼은 홀로 담벼락 앞에 서 있었습니다. 하연이의 그림들이 달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지요.
"결국 네가 왔구나."
어둠 속에서 한 저승사자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진혼의 후임이었습니다.
"너를 데리러 왔다. 저승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야."
진혼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저승사자가 아니야."
"네가 한 선택을 알고 있다. 네 생명줄을 그 아이에게 주었지. 하지만 저승에서 새로운 제안을 하셨어."
후임 저승사자의 말에 진혼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네가 그동안 배운 것들... 그 따뜻한 마음이 저승에도 필요하다고 하셨다. 이제 너는 죽음을 데려가는 자가 아닌, 마지막 순간을 지켜주는 자가 될 수 있어."
진혼의 눈에 깊은 감동이 어렸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작별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니?"
그때였습니다.
"진우 아저씨!"
하연이가 달려왔습니다. 마치 진혼의 마지막 순간을 알기라도 한 듯이.
"하연아..."
"아저씨, 제가 새로운 그림을 그렸어요. 이건 아저씨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에요."
하연이가 건넨 그림에는 밤하늘의 별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서 진혼과 하연이가 손을 잡고 있었지요.
"우리... 또 만날 수 있죠?"
하연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진혼은 따뜻하게 미소지었습니다.
"그럼... 내가 늘 너를 지켜볼 거야. 저 별들처럼..."
진혼의 모습이 달빛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갔습니다. 하연이의 손에 쥐어진 그림만이 그가 이곳에 있었다는 증거처럼 남았지요.
변화된 저승사자
세월이 흘러, 하연이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유명한 화가가 되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가고 있었지요.
어느 겨울밤, 한 할머니가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조용히 나타난 저승사자가 있었지요. 바로 진혼이었습니다.
"오랜만이군요, 할머니."
옆집 할머니였습니다. 그날 처음 된장찌개를 건네주시던 그 할머니는 이제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누워계셨습니다.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제가 모시러 왔어요."
진혼은 더 이상 차가운 저승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위로가 담겨있었고, 손길에는 깊은 감사가 묻어있었습니다.
"편히 가세요. 할머니가 나눠주신 사랑은 이 마을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할머니의 영혼이 평화롭게 떠나가는 순간, 창밖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에 따뜻한 저승사자가 나타난다고... 그리고 그때마다 하연이의 그림들이 더욱 밝게 빛난다고 합니다.
담벼락의 그림들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들... 그것은 마치 진혼이 이 마을에 남긴 사랑의 흔적 같았습니다.
밤이면 하연이는 가끔 창밖의 별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속삭입니다.
"진우 아저씨, 잘 지내시죠? 제가 오늘도 예쁜 그림을 그렸어요..."
달빛이 그녀의 방 안으로 스며들고, 어디선가 따뜻한 미소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죽음도, 삶도, 결국은 사랑이라는 걸 배운 저승사자의 따뜻한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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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인간으로 변장해 살아본 저승사자' 이야기였습니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특별한 의미...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다음 이야기에서는 '백 년째 사랑을 지키는 도깨비 -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이유'를 준비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단 하나의 사랑을 지켜온 도깨비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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