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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 조선이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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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200자)
"조선 500년 쇄국의 문이 총포 소리와 함께 열렸습니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를 향해 포문을 열었을 때, 조선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이 바뀌었습니다.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으로 시작된 개항의 아픔과 굴욕, 그 역사적 순간을 생생하게 들려드립니다."
디스크립션 (300자)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의 강화도 포격 사건부터 1876년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 체결까지, 조선이 문을 열게 된 아픈 역사를 되짚어봅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고종 친정체제로의 전환, 그리고 서구 열강의 압박 속에서 조선이 겪어야 했던 시련과 변화의 과정을 생생하게 재현합니다. 시니어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역사 교훈이 담긴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 일본의 조선 접근과 강화도 포격
1875년 9월,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는 강화도 연안. 평온했던 조선의 서해 바다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나타난 낯선 군함 한 척. 일본의 군함 운요호였습니다.
"저... 저건 무슨 배입니까?"
강화도 연안을 지키던 조선군 초병의 떨리는 목소리.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서양식 군함의 모습에 모든 병사들이 긴장했습니다. 높이 솟은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배 옆구리에는 검은 대포들이 위협적으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운요호의 함장 이노우에는 냉정한 표정으로 망원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조선의 해안 방어는 생각보다 허술하군. 명치유신 이후 우리 일본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여줄 때가 되었다."
사실 운요호의 조선 근해 출현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조선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위해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지만,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모든 교섭을 거부해왔습니다.
"조선이 자발적으로 문을 열지 않는다면, 우리가 열어주어야지."
일본은 서구 열강이 사용했던 바로 그 방법, 포함외교를 조선에 적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을 이끌고 일본에 왔듯이, 이제는 일본이 조선에 같은 방식으로 압박을 가할 차례였습니다.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연안에 더욱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조선의 영해를 명백히 침범한 것이었습니다.
"어서 물러가라! 이곳은 조선의 땅이다!"
강화도 포대의 조선군들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운요호는 오히려 더욱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마침내 참을 수 없었던 조선군이 경고포를 발사했습니다.
조선의 낡은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운요호 근처 바다에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기다렸던 순간이었습니다.
"조선이 먼저 공격했다! 모든 포대, 반격 개시!"
운요호에서는 즉시 보복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근대식 함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그 위력은 조선의 구식 대포와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강화도 포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정확한 조준으로 날아온 포탄들이 조선군의 진지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수백 년간 외침을 막아왔던 강화도의 방어선이 단 몇 시간 만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럴 수가... 우리의 대포는 왜 이렇게 짧게 날아가는 것인가?"
조선군 장교들의 절망적인 탄식. 조선의 화포 기술은 임진왜란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일본은 서구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포격이 끝난 후, 운요호는 유유히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남겨진 것은 파괴된 포대와 절망에 빠진 조선군들뿐이었습니다. 강화도의 한 노병이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변해야 하는 건가?"
운요호 사건은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쇄국과 개방,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이 격돌하는 역사의 분수령이었습니다. 조선 500년 쇄국의 벽이 이날 운요호의 포성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갈등
한성부 창덕궁, 강화도에서 전해진 급보를 받은 조선 조정은 그야말로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웠습니다. 대신들이 하나둘 궁궐로 달려와 급히 어전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전하, 대사변이 일어났습니다!"
병조판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고종에게 보고했습니다. "일본 군함이 강화도를 포격하여 우리 포대가 크게 피해를 입었사옵니다. 수십 명의 장졸이 죽거나 다쳤다고 합니다."
스물세 살의 젊은 고종은 창백한 얼굴로 어전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지 4년, 친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큰 사건이 터진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감히 우리 땅을 공격했단 말이냐?"
좌의정 박규수가 나서며 말했습니다. "전하, 이는 단순한 우발 사건이 아닙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개항시키려는 계획적인 도발로 보입니다. 서양 오랑캐들이 일본에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입니다."
이때 어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급히 궁궐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비록 정계에서 물러났지만, 이런 국가 비상사태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마님께서 오셨습니다."
고종의 표정이 복잡해졌습니다. 친정을 시작하면서 아버지와는 정치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여전히 아버지의 조언이 필요했습니다.
흰 수염을 기른 흥선대원군이 위엄 있는 걸음으로 어전에 들어섰습니다. "이 무슨 일이냐! 왜놈들이 감히 우리 강토를 침범했다고?"
"아버마님, 일본 군함이 강화도를 포격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흥선대원군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당연히 문을 더욱 굳게 닫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쇄국정책을 폈던 이유다. 서양 오랑캐들과 손잡은 왜놈들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 의견이 나왔습니다.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대원군께서는 아직도 옛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일본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셨습니까? 우리가 문을 닫고 있는 동안 그들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김홍집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습니다. "전하, 이제는 현실을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무력으로는 대적할 수 없으니, 외교로 해결해야 합니다."
"외교라니! 그것은 굴복이다!"
흥선대원군이 격분했습니다. "내가 십 년 동안 쌓아올린 쇄국의 벽을 허물자는 말이냐? 조선은 명나라 이래로 중화질서의 일원이었다. 일본 같은 섬나라와 대등하게 조약을 맺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전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한쪽에서는 "개국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국가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고종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버지의 쇄국정책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신진 관료들의 개화정책을 택할 것인가. 젊은 임금의 어깨에는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결단하셔야 합니다."
박규수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일본이 다시 군함을 보낼 것은 분명합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입장을 정해두어야 합니다."
고종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짐이... 직접 결정하겠다. 우선 일본과의 협상 가능성을 타진해보라. 다만 조선의 체면과 자주성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흥선대원군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정책 노선과는 다른 길을 택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주성을 지킨다고 하지만, 결국 왜놈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궁궐 밖에서는 운요호 사건의 소식이 한성부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불안해했고, 양반들은 모여 앉아 나라 걱정을 했습니다. 조선이라는 거대한 배가 역사의 격랑 속에서 방향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 굴욕적인 조건들
1876년 2월, 강화도 조약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 강화도였습니다. 조선 측 전권대신으로는 신헌이, 일본 측에서는 구로다 기요타카가 나섰습니다.
강화도 연무당에 마련된 협상 테이블. 조선의 붉은 비단 보자기와 일본의 검은 칠기가 대조를 이뤘습니다. 통역관들이 양쪽에 배치되었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첫 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구로다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조선국과 대일본국은 이제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평등한 관계에서 통상과 친선을 원합니다."
"평등한 관계라고 하셨습니까?"
신헌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귀국의 군함이 우리 영토를 공격한 것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불행한 오해였습니다. 우리 군함은 단순히 연안 측량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조선 측에서 먼저 포격을 가했습니다."
신헌은 분노를 억누르며 답했습니다. "측량이라고 하시지만, 우리 영해를 허가 없이 침범한 것은 명백한 도발 행위입니다."
구로다는 냉정하게 대응했습니다. "각설하고, 이제 미래를 이야기합시다. 조선도 일본처럼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발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일본이 제시한 조약 초안을 받아본 신헌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습니다. 조약의 내용은 조선에게 극히 불리한 것들뿐이었습니다.
"이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조약 초안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니, 첫째,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지만, 이는 조선을 중국의 속국에서 떼어내려는 의도가 분명했습니다. 둘째, 부산과 인천, 원산을 개항하되 일본인들에게 거주권과 치외법권을 인정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치외법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헌이 통역관에게 물었습니다. 통역관이 설명했습니다. "일본인이 우리나라에서 죄를 지어도 우리나라 법으로 처벌할 수 없고, 일본 법으로만 재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하지만 구로다는 단호했습니다. "이것은 국제적인 관례입니다. 서양 여러 나라들이 일본과 맺은 조약에도 같은 조항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도 서양 나라들에게 당한 것을 이제 우리에게 그대로 하려는 것입니까?"
구로다는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신헌의 날카로운 지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일본도 서양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조선에게 같은 방식을 적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조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협상은 계속 답보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조선 측에서는 조건을 완화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일본 측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며칠 후, 일본에서 추가 군함들이 강화도 연안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협박입니다!"
신헌이 항의했지만, 구로다는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협박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조선이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더 큰 불행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한성에서는 매일같이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고종과 조정 대신들은 연일 회의를 거듭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군사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고, 중국에 도움을 요청해도 자신들도 서양 열강들의 압박으로 여유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2월 26일, 조선은 굴욕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헌이 떨리는 손으로 조약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조선국 전권대신 신헌."
구로다도 자신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대일본국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
이렇게 해서 한일수호조규, 즉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조선 500년 쇄국의 문이 마침내 열린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문은 조선의 의지가 아니라 일본의 대포에 의해 강제로 열린 것이었습니다.
조약 체결 후, 신헌은 홀로 강화도 바닷가에 서서 망연히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과연 나라를 위한 길이었을까?"
바다 너머로 일본 군함들이 승리의 기적을 울리며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조선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희망찬 미래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굴욕의 시작을 알리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 부산항과 인천항 개방
1876년 가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지 반년 후. 부산항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상인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고, 저것들이 왜놈이구나."
부산 어시장에서 생선을 팔던 박서방이 신기한 듯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을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습니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 사람들과는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말을 하며, 다른 냄새가 났습니다.
"여보시오, 이것 얼마요?"
어설픈 조선말을 하는 일본 상인이 생선을 가리켰습니다. 박서방은 당황했습니다. 값을 어떻게 매겨야 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동안은 이웃 마을 사람들하고만 거래를 해왔는데, 갑자기 외국 사람과 장사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한... 한 냥입니다."
"너무 비싸네요. 반 냥 어떨까요?"
일본 상인은 익숙하게 흥정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나가사키나 요코하마에서 서양 상인들과 거래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반면 조선의 상인들은 이런 상황이 낯설기만 했습니다.
부산 감리사로 부임한 김석준은 매일 골치가 아팠습니다. 일본인들의 거주 구역을 정하고, 시장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감리사님,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전이 급히 달려와 보고했습니다. "일본 상인이 우리 상인과 거래할 때 은화를 주었는데, 그 은화가 가짜라고 합니다."
"가짜 은화라고?"
김석준이 놀랐습니다. 조약에는 화폐 문제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일본은 일본 화폐를, 조선은 조선 화폐를 쓰는데, 환율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도 애매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일본 화폐를 잘 모르니까, 속아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문제는 부산뿐만 아니라 인천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인천 감리사 김윤식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백성들만 손해를 보게 됩니다."
김윤식은 한성에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일본 상인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데, 우리 백성들은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어 불리합니다.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성의 조정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개항을 찬성했던 개화파조차 예상보다 빠르게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에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우리 경제가 일본에 완전히 종속되고 말 것입니다."
젊은 관료 박영효가 우려를 표했습니다. "조약을 맺을 때는 통상이 서로에게 이익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개항장의 변화는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문화적 충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본 상인들을 따라 들어온 일본 기생들, 일본 음식점, 일본 상점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부산의 한 주막에서 일하던 갑순이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일본 사람들이 이상한 음식을 먹어요. 날생선을 그냥 먹고, 국물도 이상하고..."
"저런 오랑캐들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건지..."
갑순이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서는 일본 손님들도 받아야 했습니다. 일본 상인들이 조선 상인들보다 돈을 많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에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기존 상권을 갖고 있던 조선의 거상들이었습니다. 부산의 큰 상인 최만석은 동료들을 모아놓고 분개했습니다.
"우리가 대대로 해오던 장사를 왜놈들이 가로채고 있소. 값도 더 싸게 팔고, 물건도 신기한 것들을 가져와서 우리 손님들이 다 넘어가고 있다고."
"그렇다고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조약이 맺어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최만석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일본 상인들처럼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하나 당하지 말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해요."
이렇게 해서 조선 최초의 상인 조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개항은 조선에게 위기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변화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개항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서울의 종로에서도 일본에서 들여온 물건들이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리그릇, 양은 그릇, 양초, 성냥 등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신기한 물건들이었습니다.
"이거 참 신기하구나. 이 작은 막대기로 불을 만들 수 있다니..."
성냥을 처음 본 한성 백성들이 신기해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해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상한 물건들이 들어오면 우리 장인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
실제로 일본 제품들이 들어오면서 조선의 전통 수공업자들이 타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품질은 비슷한데 가격은 더 싸거나, 아니면 아예 새로운 종류의 물건들이어서 경쟁이 되지 않았습니다.
개항 1년, 조선은 전에 없던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문이 열렸지만, 그 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들이 모두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기회와 위기가 함께 밀려오는 혼란의 시대, 조선 백성들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 백성들의 혼란과 저항
개항 소식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조선 사회 곳곳에서는 큰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유교적 전통이 깊이 뿌리박힌 지방에서는 격렬한 반발이 나타났습니다.
경상도 안동의 한 서원에서는 지역 유림들이 모여 격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서원의 원장인 김병학이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5백 년 동안 지켜온 우리 국가의 기강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있습니다. 오랑캐들과 조약을 맺다니, 이는 조상에 대한 배신입니다!"
"원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조선은 소중화라 불렸습니다. 중화문명의 정통을 이어받은 나라인데, 이제 왜놈들에게 문을 열다니..."
젊은 유생 이도영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 조약 내용입니다. 조선을 자주독립국이라고 했다지 않습니까? 이는 우리가 중국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뜻입니다. 사대주의를 버리라는 것이지요."
사실 지방 유림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조약의 첫 번째 조항이었습니다.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는 문구는 겉으로는 조선의 지위를 높여주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중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은 우리의 부모나라입니다. 그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효를 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안동 유림들은 결의를 모았습니다. "한성에 상소문을 올려야 합니다. 조약을 파기하고 다시 쇄국정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이지요."
이런 움직임은 안동만이 아니었습니다. 전국의 유림들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전라도 광주에서도, 충청도 충주에서도 상소문이 빗발쳤습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나오고 있었습니다. 개항장 근처에서 새로운 변화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객주를 하던 박상길이 고향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나도 왜놈들이 미웠소. 하지만 몇 달 지켜보니 생각이 달라지더군. 그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보면 정말 신기한 것들이 많소. 우리도 저런 것들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소."
편지를 받은 마을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상길이가 왜놈들에게 홀린 것 아닌가?"
변화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부산의 한 기생집에서 일하던 춘향이는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손님들과 소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언니, 일본말 배우는 게 그렇게 어려워?"
동료 기생이 물었습니다. 춘향이는 대답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웠는데, 하다 보니 재미있어.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야. 다만 사는 방식이 좀 다를 뿐이지."
이런 개인적인 변화들이 모여서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나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보다 변화에 적응하는 속도가 빨랐습니다.
서울의 한 서당에서 공부하던 김영수는 선생님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선생님,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서 강해졌다고 하는데, 우리도 배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슨 소리냐! 오랑캐의 기술을 배운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군자는 덕으로 다스리는 것이지, 기계나 무기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영수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지 않습니까? 운요호 한 척이 우리 강화도 포대를 무너뜨렸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답답해했습니다. "너희들은 눈앞의 이익만 보고 근본을 잊고 있다. 우리의 근본은 유교 문화다. 그것을 버리면 우리는 조선이 아니다."
이런 갈등은 가정 내에서도 벌어졌습니다. 한성의 한 양반가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매일 다투었습니다.
"아버지, 시대가 변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합니다."
"새로운 학문이라니! 사서삼경이면 충분하다. 조상들이 수백 년 동안 그것으로 나라를 다스려왔지 않느냐."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일본을 당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배워서 우리보다 앞서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화를 냈습니다. "과학, 기술... 그런 것들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느냐? 인의예지가 진짜 학문이다!"
하지만 아들은 굽히지 않았습니다. "인의예지도 중요하지만, 나라가 망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먼저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야 인의예지도 펼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논쟁은 조선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개화와 수구,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지방에서는 더욱 극단적인 반응들이 나타났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 상품을 사지 말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일본어를 배우는 사람들을 매국노라고 비난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왜놈들의 물건을 사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전라도 어느 시장에서 외친 한 양반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현실적인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미 조약이 맺어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조선 사회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5백 년 동안 유지되어온 전통 사회가 흔들리고 있었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혼란스러워했지만, 변화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 쇄국에서 개방으로의 전환점
1876년 말,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지 1년이 흘렀습니다. 조선은 이제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개항의 파장은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 미쳤고, 조선인들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창덕궁 대조전에서 고종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스물네 살이 된 젊은 임금은 지난 1년 동안 겪은 변화들을 되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고종의 마음은 복잡했습니다. 개항 이후 들어온 소식들은 엇갈렸습니다. 개항장에서는 새로운 상품들이 들어와 백성들의 생활이 조금씩 편해지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전통 수공업자들이 타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이때 내관이 들어와 보고했습니다. "전하, 중국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개항에 대해 문의하러 온 것 같습니다."
중국의 반응이었습니다.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맺고 '자주독립국'이라는 지위를 인정받은 것에 대해 중국 정부는 불편해하고 있었습니다. 수백 년간 유지되어온 조공 관계에 균열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중국도, 일본도...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생각했습니다. 대원군은 여전히 개항을 반대하고 있었고, 기회가 되면 다시 쇄국정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열린 문을 다시 닫는 것이 가능할까요?
한편 궁궐 밖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지식인들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개화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젊은 관료들이 박규수의 집에 모여 토론을 벌였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도 일본처럼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김옥균이 열정적으로 말했습니다. "부국강병이 답입니다. 경제를 발전시키고 군사력을 기르지 않으면 계속 당하기만 할 것입니다."
박영효도 동조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기술만 배워서는 안 됩니다. 서양의 정치 제도, 교육 제도도 연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박규수는 신중한 입장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열정은 이해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나아가면 백성들의 반발을 받을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실제로 백성들의 반응은 복잡했습니다. 개항장 근처의 사람들은 변화에 비교적 적응하고 있었지만, 내륙 지방의 백성들은 여전히 불안해했습니다.
충청도의 한 농민 이갑수는 아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들아,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네가 자랄 때쯤이면 더 많이 변할 것 같다."
"아버지, 변하는 게 나쁜 건가요?"
"나쁘다, 좋다를 말할 수는 없지. 다만 우리가 적응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변화를 거부하면 도태되고, 너무 빨리 따라가려 하면 뿌리를 잃는다."
이갑수의 말은 당시 조선 백성들의 심정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변화는 필요하지만, 그 속도와 방향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개항 1년을 맞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반응들이 나타났습니다. 부산에서는 조선과 일본 상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시장이 열렸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경계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협력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인천에서는 조선 최초의 근대식 학교가 세워질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어와 서양 수학을 가르치는 학교였습니다.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왜놈 말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이제는 필요한 시대가 되었잖아요. 모르면 손해를 보게 됩니다."
서울에서는 일본에서 들여온 신문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한문으로 번역된 일본 신문을 통해 세계 정세를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게 신문이라는 건가? 세상 소식을 이렇게 빨리 알 수 있다니..."
정보의 유통도 빨라졌습니다. 개항 이전에는 한 달 걸려서 전해지던 소식이 이제는 며칠 만에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운요호 사건으로 시작된 변화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쇄국에서 개방으로, 전통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 길이 평탄하지는 않을 것이었지만,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종은 창문을 통해 궁궐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한성 거리에는 예전과는 다른 활기가 넘쳤습니다. 새로운 물건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생각들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과거를 그리워하기보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은 조선 역사의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그것은 굴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였습니다. 조선의 진짜 시험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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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조선 500년 쇄국의 문이 열린 그 역사적 순간을 함께 되돌아보았습니다. 굴욕적이었지만 피할 수 없었던 개항, 그리고 그로 인해 시작된 조선 사회의 대변화. 우리는 이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변화를 거부하면 도태되고, 무작정 따라가면 정체성을 잃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흐름을 읽고 우리만의 방식으로 적응하는 지혜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혼란과 선택의 순간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 있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개항 이후 조선 내부에서 벌어진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을 다뤄보겠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와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사이의 치열한 갈등, 그리고 그 속에서 고종이 내려야 했던 어려운 결단들을 생생하게 들려드리겠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 잊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