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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노총각과 서른둘 노처녀의 첫날밤 (정조 실록)
가난 때문에 혼기를 놓친 남녀를 나라가 조사해 혼례 비용을 대주고 짝을 맺어준 일이 실제로 있었다. 도성 안 백성의 혼사를 임금이 직접 챙긴 사연과, 그 부부가 이웃의 축복 속에 살아간 이야기를 한 편의 글로 남긴 선비의 기록까지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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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가난하여 혼기를 훌쩍 놓친 조선시대의 노총각과 노처녀들! 임금님께서 직접 나서서 중매를 서고 혼례 비용까지 전부 대주셨다는데, 과연 실화일까요? 스물아홉 노총각 김 서방과 서른둘 노처녀 신씨의 가슴 따뜻하고 웃음꽃 피어나는 혼례식과 첫날밤 이야기.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정조 대왕 시절의 훈훈한 역사 속으로 지금 들어가 봅니다.
※ 1: 한숨만 깊어지는 노총각과 노처녀
한양 도성 밖, 낡고 허름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빈민촌의 아침. 스물아홉 살의 김 서방은 오늘도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지게를 짊어지고 나설 채비를 합니다. 보통의 사내들이라면 십 대 중후반에 벌써 장가를 들어 아이가 서넛은 있었을 나이. 하지만 김 서방은 스물아홉이 되도록 상투도 틀지 못한 채 땋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총각 신세입니다. 낡은 짚신을 고쳐 신는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풍파와 가난의 고단함이 깊게 패어 있습니다.
'내 나이가 내년이면 서른이건만, 아직도 아낙의 손길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이리 홀로 늙어가는구나. 늙고 병드신 부모님 봉양하느라 밤낮으로 남의 집 품팔이를 하고,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렸건만, 수중에 남은 것은 땡전 한 푼 없는 가난뿐이로다. 어느 뉘 집 귀한 딸자식이 나 같은 찢어지게 가난한 놈에게 시집을 오려 하겠는가. 그저 이번 생은 부모님 곁을 지키며 홀로 외롭게 늙어 죽을 팔자인가 보다.'
김 서방이 지게를 지고 집을 나설 때, 동네 어귀에 모여 있던 아낙네들이 쯧쯧 혀를 차며 수군거립니다.
"아이고, 저기 저 김 서방 가는 것 좀 보소. 인물도 훤칠하고 심성도 저리 고운데,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아직도 장가를 못 가고 저리 늙어가네. 참으로 딱하기도 하지."
"내 말이 그 말이네. 사내가 나이 서른이 다 되어가도록 장가를 못 가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나라에서 무슨 대책이라도 세워줘야지, 저러다 늙어 죽으면 원귀가 될 것이야."
비슷한 시각, 도성 안의 또 다른 허름한 기와집 행랑채. 삯바느질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서른둘의 노처녀 신씨가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바늘귀에 실을 꿰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서른둘의 처녀라니, 이는 그야말로 천연기념물보다 희귀하고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 십상인 처지였습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 집에 얹혀살며 눈칫밥을 먹어온 그녀는, 혼기는 고사하고 당장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조차 버거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또 하루가 밝아오는구나. 어젯밤에도 삯바느질을 하느라 눈이 침침한데, 이 옷을 다 지어 줘야 보리쌀 한 되라도 얻을 수 있을 터. 내 나이 서른둘. 남들은 벌써 시어머니 소리를 들을 나이에, 나는 아직도 처녀 귀신 소리를 들으며 수모를 겪고 있구나. 길을 걷다 보면 동네 아이들마저 나를 보며 노처녀라 놀려대니, 차라리 산속 깊은 암자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는 것이 속 편할지도 모르겠구나.'
신씨의 손끝이 바늘에 찔려 붉은 피가 배어 나옵니다. 그녀는 쓰라린 손가락을 입에 물고는 남몰래 눈물을 훔칩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지만, 가난 때문에 평범한 여인의 삶조차 누려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서글프고 원망스러웠습니다. 동네 매파(중매쟁이) 할멈이 가끔 찾아오기도 했지만, 혼수품은커녕 숟가락 하나 챙겨갈 수 없는 빈털터리 노처녀를 데려갈 혼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아이고, 신씨 처자. 아직도 그 바느질을 붙들고 있는 겐가. 참으로 안타까워 죽겠네. 처자 나이가 올해 서른둘이지? 옛날 같았으면 벌써 혼기를 두 번은 놓쳤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가 다리 하나 성치 않은 홀아비라도 알아봐 줄까?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매파 할멈의 가시 돋친 참견에 신씨는 묵묵히 고개만 숙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할머니. 저는 그저 이대로 삯바느질이나 하며 조용히 살다 가렵니다. 뉘 집의 짐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스물아홉의 노총각 김 서방과 서른둘의 노처녀 신씨. 서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 채 한양 땅 어디선가 각자의 고단한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두 사람. 혼인이라는 인륜지대사는 그들에게 너무나도 높고 아득한 담장 너머의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난과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 속에서, 두 사람의 한숨은 짙은 안개가 되어 조선의 하늘 위로 무겁게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 2: 정조 대왕의 특별한 어명
그해 조선 땅에는 유독 비가 내리지 않아 끔찍한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쩍쩍 갈라진 논바닥을 바라보며 백성들은 하늘만 우러러 통곡했고, 조정의 대신들 역시 근심이 태산 같았습니다. 창덕궁 희정당 안, 정조 대왕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용상에 앉아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성군으로 널리 알려진 정조는, 이 모든 가뭄의 원인이 임금인 자신의 부덕함 때문이라 여기며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습니다.
"과인이 덕이 부족하여 하늘이 노하신 모양이오. 기우제를 여러 번 지냈음에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으니, 도대체 백성들의 고통을 어찌 달래주어야 한단 말이오. 영의정은 이 사태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오?"
정조 대왕의 묵직하고도 애타는 물음에, 당상관복을 입은 늙은 영의정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굽혀 아룁니다.
"전하, 예로부터 하늘의 이치는 음양의 조화에 있다고 하였사옵니다. 가뭄이 이토록 길어지는 것은, 도성 안팎에 혼기를 놓치고 홀로 늙어가는 광부(鰥夫, 홀아비와 노총각)와 원녀(怨女, 과부와 노처녀)들의 억울하고 원통한 기운이 하늘에 닿아 음양의 화합을 깨뜨렸기 때문인 줄로 아옵니다. 그들의 한 맺힌 탄식이 비구름을 몰아내고 있는 것이옵니다."
'광부와 원녀의 한탄이라... 가난하여 혼인을 하지 못한 백성들의 눈물이 하늘의 노여움을 샀단 말인가. 참으로 과인의 불찰이 크도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가정을 꾸리고 대를 잇는 평범한 기쁨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거늘, 내가 어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단 말인가.'
정조 대왕은 무릎을 탁 치며 결연한 표정으로 어좌에서 일어납니다. 그의 눈빛에는 백성을 향한 깊은 연민과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영의정의 말이 지당하오. 가난 때문에 인륜의 가장 큰 축복인 혼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백성이 있다는 것은 나라의 큰 수치이자 임금의 죄요! 승지는 당장 과인의 어명을 적어 한성부와 각 도의 관찰사에게 하달하시오!"
정조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대전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립니다.
"도성 안은 물론이고 팔도 방방곡곡을 샅샅이 뒤져, 나이가 스물다섯이 넘도록 가난하여 혼인하지 못한 남녀를 모조리 조사해 보고하시오. 그들의 혼사는 과인이 직접 책임질 것이오! 호조(戶曹)의 창고를 열어 그들의 혼례에 필요한 쌀과 포목, 그리고 엽전을 아낌없이 내어주도록 하라. 나라에서 중매를 서고, 나라의 돈으로 혼례를 치르게 하여, 단 한 명의 백성도 홀로 늙어가는 서러움을 겪지 않게 하라! 이것이 과인의 뜻이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백성들의 원한이 눈 녹듯 사라지고, 틀림없이 단비가 내릴 것이옵니다!"
대신들이 일제히 엎드려 성군의 하교에 칭송을 올립니다. 한 나라의 지존이 직접 나서서 노총각과 노처녀의 결혼 자금을 지원하고 짝을 지어주라는 파격적인 어명. 이는 단순히 가뭄을 해갈하기 위한 미신적인 처방을 넘어, 가장 소외되고 가난한 백성들의 실질적인 고통을 어루만지려는 정조 대왕만의 따뜻하고도 혁신적인 애민 정책이었습니다. 어명이 내려지자마자 승정원에서는 발 빠르게 교지를 작성하여 한양 도성과 전국 각지로 파발을 띄웠습니다.
관아의 관리들은 임금의 불호령에 따라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한성부 관할의 빈민촌을 돌며 노총각과 노처녀들의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에서 돈을 대주어 혼인을 시켜준다는 꿈만 같은 소식은 삽시간에 저잣거리를 휩쓸었고, 가난에 찌들어 혼인을 포기했던 백성들의 메마른 가슴 속에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임금님의 특별한 은총은 이제, 스물아홉 노총각 김 서방과 서른둘 노처녀 신씨의 고단한 초가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 3: 기적처럼 맺어진 인연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김 서방의 허름한 사립문 밖이 왁자지껄한 소리로 소란스러워집니다. 지게를 내려놓고 구슬땀을 닦던 김 서방은 영문을 몰라 눈을 휘둥그레 뜹니다. 관아의 나장(포졸)들과 함께 동네에서 입담 좋기로 소문난 관수동 매파 할멈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나장들의 손에는 묵직한 쌀가마니와 고운 명주천, 그리고 엽전 꾸러미가 들려 있었습니다.
"아이고, 김 서방! 복 터졌네, 복 터졌어! 임금님께서 자네를 장가보내라고 특별히 어명을 내리셨다네!"
"예? 임금님께서 저를요? 그, 그게 무슨 호랑이 풀 뜯어 먹는 소리입니까. 저같이 찢어지게 가난한 놈이 어찌 혼례를 올린단 말입니까."
김 서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내저으며 뒷걸음질을 칩니다. 그러자 나장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헛기침을 하고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전하께서 가난하여 혼기를 놓친 백성들을 위해 친히 호조의 곳간을 열어 혼례 비용을 하사하셨다. 여기 이 쌀과 옷감, 그리고 엽전 오백 냥이 모두 네 혼례를 위해 나라에서 내어준 것이니, 감사히 받고 어서 장가갈 채비나 하거라!"
'아아... 전하께서 나 같은 미천한 백성의 사정까지 굽어살피셨단 말인가. 평생 남의 집 품팔이나 하며 홀로 늙어 죽을 줄 알았건만, 나라에서 내 혼례를 치러 주시다니. 참으로 성은이 망극하여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김 서방은 털썩 무릎을 꿇고 궁궐이 있는 북쪽을 향해 연신 큰절을 올렸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거친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매파 할멈은 김 서방의 등을 토닥이며 흐뭇한 표정으로 덧붙입니다.
"그래, 내 관아의 부탁을 받고 자네에게 딱 어울리는 참한 처자를 하나 골라두었지. 나이가 조금 차긴 했지만, 심성이 비단결 같고 바느질 솜씨가 한양에서 제일가는 일등 신부감일세. 교동에 사는 신씨 처자인데, 나이가 서른둘이라네."
"서, 서른둘이요? 저보다 세 살이나 위가 아닙니까?"
"아따, 이 사람아!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가! 신씨 처자도 가난해서 혼기를 놓친 것이지, 인물이나 품성은 양반댁 규수 못지않네. 전하께서 맺어주신 천생연분이니 그리 알고 내일모레 당장 사주단자를 넣을 채비나 하시게!"
비슷한 시각, 교동에 사는 신씨 처녀의 행랑방 앞에도 관아에서 나온 관리들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밤낮으로 삯바느질을 하느라 등이 굽을 지경이던 신씨는, 마당에 쌓이는 쌀가마니와 고운 혼례복 옷감을 보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신씨 처자, 임금님의 어명으로 자네의 혼처가 정해졌네. 신랑은 동대문 밖에 사는 스물아홉의 김 서방이라는 참하고 부지런한 청년일세. 가난하지만 부모를 끔찍이 모시는 효자이니, 자네와 백년해로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야."
신씨는 떨리는 손으로 나라에서 내려준 고운 다홍빛 비단을 매만졌습니다. 평생 남의 옷만 지어주며 자신의 옷 한 벌 제대로 지어 입지 못했던 서러운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내가... 이 서른둘의 노처녀가 시집을 가게 되다니. 그것도 나라에서 내어준 고운 옷감을 두르고, 듬직한 사내의 아내가 된단 말인가. 꿈이 아니겠지. 부디 이 꿈에서 깨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신씨는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소리 없이 오열했습니다. 임금님의 특별한 어명은 메말랐던 두 남녀의 삶에 기적처럼 따뜻한 봄비를 뿌려주었습니다. 한양 도성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이렇게 나라의 지원을 받아 혼례를 치르게 된 광부와 원녀들이 수백 쌍에 달했습니다. 스물아홉 살의 노총각과 서른둘 살의 노처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들의 서러운 인생에 태어나서 가장 눈부시고 벅찬 잔칫날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하늘도 그들의 기쁨에 화답하듯, 그날 밤 조선 땅에는 오랫동안 백성들이 목 빠지게 기다려온 시원한 단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 4: 임금님이 내어주신 혼례식
기다리던 단비가 밤새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고 지나간 다음 날 아침, 맑게 갠 푸른 하늘 아래 한양 도성의 교동 어귀가 이른 아침부터 꽹과리와 장구 소리로 떠들썩하게 들썩이기 시작합니다. 평소 같으면 고단한 하루를 시작하느라 한숨 소리만 가득했을 가난한 빈민촌 골목이, 오늘만큼은 임금님이 직접 내어주신 어명 덕분에 세상 그 어느 대갓집 잔치 부럽지 않은 화려하고 흥겨운 축제의 장으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골목 어귀마다 내걸린 청사초롱이 아침 햇살을 받아 붉고 푸른빛을 맑게 반짝였고, 동네 아낙네들은 며칠 전부터 관아에서 하사받은 넉넉한 쌀과 고기를 가지고 삼삼오오 모여 전을 부치고 떡을 치며 고소한 잔치 음식 냄새를 온 동네방네 풍겨대고 있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혼기를 놓쳤던 스물아홉 살의 노총각 김 서방과 서른둘 살의 노처녀 신씨가 드디어 백년가약을 맺는, 참으로 기적 같고 감격스러운 혼례 날이 밝은 것입니다.
'내 평생에 이토록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부신 아침을 맞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부모님 봉양하느라 내 한 몸 챙길 여유도 없이 지게만 지고 살았던 지난 세월이, 오늘을 위한 기다림이었던가. 전하께서 베풀어주신 이 크나큰 은혜를 뼛속 깊이 새겨, 평생토록 아내를 아끼고 백성 된 도리를 다하며 살아갈 것이다.'
김 서방은 생전 처음 입어보는 화려한 사모관대(사대부들이 입는 관복이지만, 혼례 날만큼은 평민에게도 착용이 허락된 예복)를 갖춰 입고 거울 앞에 섰습니다. 남들보다 십여 년이나 늦게 틀어 올린 상투 위로 번듯한 사모를 쓰고, 가슴에 쌍학 흉배가 수놓아진 단령을 입은 그의 모습은 늠름하고 훤칠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평생 남루한 베옷만 입고 살던 아들의 늠름한 자태를 바라보며, 방 한구석에 앉은 김 서방의 늙은 부모님은 기쁨과 회한이 교차하는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장하네. 내 죽기 전에 네 놈 장가가는 꼴을 못 볼 줄 알았더니, 나라님 덕분에 이리 호강을 다 누려보는구나. 늦게 가는 장가인 만큼, 남들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서로를 위하며 정답게 살아야 한다. 알겠느냐?"
"예, 어머님, 아버님. 걱정 마시옵소서. 제가 비록 가진 것은 비루한 몸뚱이 하나뿐이나, 그 사람의 눈에 두 번 다시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평생을 다해 지키고 아껴줄 것이옵니다."
비슷한 시각, 신부 집인 신씨의 행랑채에서도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감동스러운 단장이 한창이었습니다. 삯바느질로 잔뼈가 굵은 신씨는 관아에서 하사받은 붉은 명주와 푸른 비단으로 밤을 새워 자신의 혼례복인 활옷을 직접 정성껏 지어 입었습니다. 양 볼에 붉은 연지 곤지를 곱게 찍고, 머리에는 칠보 화관을 얹은 서른둘의 신부. 세월의 풍파에 조금은 빛이 바랬을지 모르나, 오랜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 여인 특유의 깊고 단아한 기품이 그녀의 얼굴 위로 눈부시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평소 그녀를 처녀 귀신이라 놀리며 수군대던 동네 사람들도, 오늘만큼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진심 어린 축복의 말을 건네며 그녀의 앞날을 응원해주었습니다.
"아이고, 우리 신씨 처자 인물 고운 것 좀 보소. 한양 도성에서 제일가는 미색이 따로 없네그려! 서른둘이면 어떻고 마흔이면 어때. 임금님께서 친히 중매를 서신 조선 최고의 귀한 신부인데! 신랑 되는 김 서방도 훤칠한 대장부라 하니, 참으로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일세 그려!"
'아아, 참으로 꿈만 같구나. 동네 사람들의 따뜻한 축복 속에, 이렇게 고운 옷을 입고 평생의 반려자를 맞이하게 되다니. 늦게 피어난 꽃이 더 짙은 향기를 품는다고 하였던가. 나의 지난 서른두 해의 춥고 외로웠던 시간들이, 오늘 이 눈부신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만 같구나.'
오후가 되자, 나무 기러기를 든 기럭아비를 앞세운 신랑 김 서방의 혼례 행렬이 풍악을 울리며 신부의 집 앞마당으로 당당하게 들어섰습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붉고 푸른 천으로 장식된 초례청이 성대하게 차려져 있었고, 동네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구경을 나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마주 서서 서로에게 큰절을 올리는 교배례(交拜禮)가 엄숙하고도 성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청색과 홍색의 명주실처럼, 평생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고단했던 인연이 비로소 부부라는 이름으로 굳게 얽혀드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혼례상 위로 놓인 술잔을 나누어 마시는 그들의 뺨 위로,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촉촉하게 흘러내렸습니다. 가뭄 끝에 내린 단비처럼, 가난과 설움에 메말라 있던 두 사람의 가슴 속에 영원히 마르지 않을 사랑과 희망의 샘물이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 5: 스물아홉과 서른둘의 첫날밤
왁자지껄했던 동네 잔치가 모두 끝나고, 사위가 깊은 어둠과 고요함으로 물든 깊은 밤. 작고 소박하지만 이웃들의 정성으로 아늑하게 꾸며진 신방 안에는 은은한 촛불 하나만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창호지 문 위로 흔들리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방 밖에서는 늦가을 귀뚜라미 울음소리만이 처량하게 들려올 뿐, 방 안에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숨 막히는 긴장감과 묘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스물아홉 살의 노총각 신랑과 서른둘 살의 노처녀 신부. 혼기가 한참을 지나 산전수전을 다 겪을 만큼 나이가 찬 두 사람이었지만, 사내와 여인으로서 마주 앉은 이 첫날밤의 자리만큼은 갓 혼례를 올린 십 대의 어린 꼬마 신랑 신부 못지않게 어색하고 수줍기만 했습니다.
'이토록 고운 여인이 정녕 나의 아내가 맞단 말인가. 눈을 마주치려 하니 심장이 고장 난 듯 쿵쾅거려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 나이 스물아홉을 먹도록 여인의 손길 한 번 스쳐본 적 없는 쑥맥이건만, 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어 이 어색함을 풀어야 한단 말인가. 행여나 나의 투박하고 거친 말씨가 고운 신부의 마음에 상처라도 입히면 어찌할꼬.'
김 서방은 애꿎은 방바닥만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맞은편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신씨 역시 상황은 매한가지였습니다. 화려한 칠보 화관의 무게만큼이나, 그녀의 가슴속에는 설렘과 함께 설명하기 힘든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평생 홀로 삯바느질만 하며 살아온 자신이 과연 한 사내의 지어미로서 부족함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서른둘이라는 늦은 나이가 혹여 듬직한 신랑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지 온갖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결국 기나긴 침묵을 깬 것은 듬직한 신랑, 김 서방이었습니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혀 신부의 앞으로 다가앉았습니다. 그리고는 투박하지만 다정한 손길로 신부의 머리 위에 얹힌 무거운 화관을 살포시 벗겨내어 주었습니다.
"부인, 늦은 밤까지 무거운 장식을 이고 계시느라 참으로 고단하셨지요. 부족한 사람에게 시집을 와주어 고맙소. 그저 평생을 홀로 흙이나 파먹다 늙어 죽을 팔자라 여겼거늘, 부인처럼 참하고 고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니 이 모든 것이 꼭 한여름 밤의 길몽을 꾸는 것만 같소."
낮고 따뜻한 신랑의 목소리에 신씨는 그제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살며시 들어 그의 두 눈을 마주 보았습니다. 김 서방의 선하고 맑은 눈망울에는 그녀를 향한 깊은 연민과 단단한 책임감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신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서방님, 당치도 않으신 말씀이옵니다. 제 나이가 벌써 서른둘이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를 보고 말라 비틀어진 고목나무라 손가락질을 하였지요. 가난한 친척 집에 얹혀살며 눈칫밥을 먹느라, 제 손은 이렇게 굳은살이 박이고 거칠어졌사옵니다. 이런 부족하고 나이 든 여인을 거절하지 않고 따뜻하게 품어주시니, 오히려 제가 평생을 다 바쳐 서방님을 섬겨야 할 것이옵니다."
신씨가 부끄러운 듯 바느질로 흉터가 가득한 자신의 거친 손을 치맛자락 밑으로 감추려 하자, 김 서방은 얼른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두 손을 꽉 마주 잡았습니다.
"부인, 흉터라니요. 이 거친 굳은살이야말로 부인께서 험난한 세상을 얼마나 억척스럽고 치열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살아오셨는지를 증명하는 눈부신 훈장이 아니오. 삯바느질을 하느라 거칠어진 부인의 손이나, 땔감을 구하느라 갈라진 나의 투박한 손이나 매한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손이외다. 우리 비록 남들보다 십여 년이나 늦게 맺어진 인연이지만, 그만큼 헛되이 보낸 젊음을 보상받듯 남은 평생 백 배, 천 배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서방님... 아아, 참으로 고맙습니다. 전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도 하늘 같거니와, 서방님의 그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 저의 지난 서러웠던 세월이 봄눈 녹듯 다 사라지는 듯하옵니다."
신방 안을 밝히던 촛불이 일렁이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로 포개어 놓았습니다. 스물아홉과 서른둘, 남들이 보기엔 그저 늦깎이 노총각과 노처녀의 우스운 결합일지 몰라도, 두 사람에게 이 밤은 세상 그 어떤 귀족들의 첫날밤보다도 애틋하고 숭고한 구원의 시간이었습니다.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욱 깊이 보듬어 안을 수 있었던 두 사람. 조용히 타오르던 촛불이 꺼지고, 길고 춥기만 했던 두 남녀의 인생에 비로소 가장 따뜻하고 눈부신 진짜 봄날이 소리 없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 6: 영원한 백년해로의 기록
그 기적 같았던 임금님의 혼례 특명이 내려지고 몇 해의 세월이 평화롭게 흘렀습니다. 한양 도성 밖의 작은 초가집 마당에서는 아침부터 경쾌한 다듬이질 소리와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은혜로 늦깎이 부부가 되었던 김 서방과 신씨 부부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원앙 부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비록 살림살이는 크게 나아지지 않아 여전히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은 매사에 서로를 끔찍이 위하고 아끼며 누구보다 성실하게 삶을 일구어 나갔습니다. 늦은 나이에 기적처럼 얻은 옥동자는 부부의 삶에 찾아온 또 다른 커다란 축복이었고, 세 식구의 얼굴에는 가난의 그늘 대신 늘 환하고 평온한 웃음꽃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그 무렵, 서민들의 소박하고 진솔한 삶의 풍경을 즐겨 관찰하며 글을 쓰던 규장각의 학명 높은 선비 이덕무(李德懋)가 우연히 민생을 살피러 빈민촌 어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평소 화려하고 과장된 사대부들의 글보다는, 백성들의 땀내 나는 삶 속에 깃든 진실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마당에서 다정하게 마주 앉아 짚신을 꼬고 있는 부부의 눈부시게 평화로운 모습을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부부로구나. 남편은 아내를 위해 그늘을 만들어주고, 아내는 남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니, 저들이야말로 맹자가 말한 진정한 인륜의 화합이 아니겠는가. 저 부부의 표정에는 가식이나 근심이 한 점도 보이지 않는구나."
이덕무는 호기심이 동하여 마침 곁을 지나던 동네 노인에게 부부의 사연을 넌지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신이 나서 며칠을 이야기해도 모자랄 정조 대왕의 특별한 어명과, 혼기를 훌쩍 넘겨 맺어졌던 김 서방과 신씨 부부의 가슴 따뜻한 혼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임금님이 나라의 곳간을 열어 가난한 노총각 노처녀들의 혼례를 치러주었고, 그 은혜에 보답하듯 부부가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백년해로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덕무의 가슴에 깊고 진한 묵직한 울림을 남겼습니다.
'아아, 전하의 성덕이 이처럼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삶 속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구나. 진정한 정치란 거창한 법령이나 위엄을 세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외롭고 헐벗은 백성 단 한 사람의 눈물조차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삶에 봄을 찾아주는 것임을. 가난하여 혼기를 놓친 백성들의 짝을 찾아준 전하의 어진 정사(政事)와, 역경을 딛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 늦깎이 부부의 아름다운 미덕은 후세에 길이길이 귀감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규장각으로 돌아온 이덕무는 곧바로 먹을 갈아 붓을 들었습니다. 화려한 궁중의 역사나 고위 관료들의 딱딱한 정쟁 이야기가 아닌, 도성 밖 허름한 초가집에서 살아가는 평범하고 가난한 부부의 이야기. 그는 떨리는 붓끝으로 그들의 이름과 사연을 정성스럽게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와 우리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실화,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의 탄생이었습니다.
스물아홉의 늦깎이 노총각 김 서방과, 서른둘의 노처녀 신씨. 세상의 무관심과 가난 속에서 소리 없이 시들어갈 뻔했던 두 사람의 인생은, 어진 임금의 세심한 애민 정신과 그들의 사연을 귀하게 여긴 한 선비의 따뜻한 기록 덕분에 조선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로맨스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덕무의 낡은 문집 속에서 두 부부의 소박하고 다정한 미소는 여전히 시들지 않는 따뜻한 온기로 남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삭막한 가슴을 훈훈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정조 대왕의 따뜻한 애민 정신이 만들어낸 스물아홉 노총각과 서른둘 노처녀의 기적 같은 혼인 이야기, 어떻게 들으셨나요? 백성의 작은 눈물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성군의 마음과, 서로의 흉터를 보듬으며 늦깎이 사랑을 꽃피운 김신 부부의 이야기가 긴 여운을 남깁니다. 오늘 이야기가 즐거우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꼭 부탁드립니다! 다음 시간에도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우리 조상들의 사람 냄새 물씬 나는 흥미진진한 조선 야사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