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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찬탈자에서 명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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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7대 왕 세조는 어떻게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찬탈자에서 조선의 기틀을 다진 명군으로 평가받게 되었을까? 계유정난을 일으켜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의 야망과 그 이후 보여준 통치 능력, 그리고 말년에 찾아온 회한까지. 역사의 어둡고 밝은 두 얼굴을 모두 지닌 세조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 수양대군의 야망과 계유정난
1455년 음력 6월, 조선 궁궐의 회랑에는 차가운 달빛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왕좌에 오른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난 문종의 빈자리를 열두 살 어린 단종이 채우고 있었습니다.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창 너머로 보이는 경복궁의 전각들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린 조카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까. 김종서와 황보인 같은 원로 대신들이 실권을 쥐고 있는 지금, 세종의 뜻대로 나라가 운영되고 있는가." 그의 눈빛에는 야망이 서서히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의 처소에는 한명회, 권람 같은 측근들이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나라의 정세에 대해 논하곤 했습니다. "대군께서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서 나라를 위해 나서셔야 합니다. 김종서와 황보인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은 위험합니다." 한명회의 말에 수양대군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힌 듯했습니다.
계유년 윤6월 1일, 수양대군은 측근들과 마지막 회합을 가졌습니다. "오늘 밤 움직이겠소.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나라의 안위를 지켜야 하오." 권람이 물었습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수양대군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실패는 없소. 우리에게는 정의가 있소. 세종의 뜻을 지키기 위한 정의가."
그날 밤, 수양대군은 친위대를 이끌고 궁으로 향했습니다. 경회루 연못 위로 달빛이 일렁이는 시각, 김종서가 대궐 문을 들어서는 순간이었습니다. "반역자를 체포하라!" 수양대군의 외침과 함께 숨어있던 병사들이 김종서를 에워쌌습니다. 김종서는 놀란 눈빛으로 수양대군을 바라보았습니다. "대군, 이것이 무슨 짓입니까?" 그러나 수양대군의 칼날은 이미 김종서의 가슴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대들은 어린 임금을 이용해 권력을 사유화했소. 이는 반역이오."
김종서가 쓰러진 후, 황보인과 그의 측근들도 차례로 체포되어 처형당했습니다. 궁궐 안은 순식간에 수양대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어린 단종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채, 숙부의 설명을 들어야 했습니다. "전하, 김종서와 황보인이 반역을 꾀했으나 다행히 사전에 적발하여 처리했습니다. 이제 신이 직접 정무를 보필하겠습니다." 단종의 어린 얼굴에는 공포와 혼란이 교차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계유정난 이후, 조정은 급격히 재편되었습니다. 수양대군은 국정을 장악했고, 신숙주, 박중림과 같은 실용주의적 관료들이 그의 편에 섰습니다. 집현전은 해체되었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중시하던 세종 시대의 기풍은 사라져갔습니다. 수양대군은 밤마다 고뇌했습니다. "나의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러나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의 내면에서는 야망과 의무감, 그리고 죄책감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한편, 계유정난의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백성들은 혼란스러웠고, 일부 사대부들은 수양대군의 행동에 분노했습니다. "수양대군이 어린 임금의 권위를 훼손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백성들에게는 궁중의 권력 다툼이 그저 먼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고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고, 단지 새로운 권력자가 그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해주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이후 1년간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왕위 찬탈을 위한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의 눈에는 이제 오직 왕좌만이 남아있었습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내가 직접 왕이 되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게 수양대군의 야망은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갔고, 조선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 왕위 찬탈과 단종의 비극
1456년 음력 6월, 창덕궁의 인정전. 수양대군은 신하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1년간 실질적 권력을 행사해온 그는 이제 마지막 걸음을 내딛으려 했습니다. "어린 임금께서는 나라를 다스리기에 아직 준비가 부족하시니, 내가 왕위를 이어받아 나라를 안정시켜야 하겠소." 그의 말에 신하들은 고개를 숙였습니다. 일부는 동의하는 기색이었고, 일부는 분노를 숨기지 못했지만, 이미 권력의 무게는 수양대군에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집현전 학사 성삼문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움켜쥐었습니다. 그의 동료 박팽년의 눈에도 분노가 서렸습니다. 그들에게 단종은 여전히 정통성 있는 임금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피를 이은 정통 임금을 몰아내다니, 이는 하늘의 도리를 거스르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속으로만 삭혀야 했습니다. 궁궐 안팎에는 수양대군의 친위대가 포진해 있었고,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은 이미 무력화되어 있었습니다.
단종은 창덕궁 후원에서 마지막으로 한양의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열세 살의 어린 임금은 숙부의 결정에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할아버지 세종의 나라를 내가 이리 쉽게 내주어야 하다니..." 심복 내시 한 명이 다가와 속삭였습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단종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 언젠가는 다시 할아버지의 꿈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궁을 떠나야 했습니다. 수양대군은 조선의 제7대 왕 세조로 즉위했습니다. 즉위식에서 그는 당당했습니다. "나는 세종의 뜻을 이어 나라를 더욱 굳건히 하겠노라."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깊은 내면에는 여전히 불안과 회한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세조의 즉위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 안팎에서는 미묘한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집현전 학사들은 비밀리에 단종의 복위를 모의했습니다. 그들은 밤마다 은밀히 모여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 단종 전하를 다시 왕위에 모셔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이미 세조의 첩자들에게 포착되어 있었습니다. 1456년 음력 6월 2일, 성삼문 일파는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의금부에서의 심문은 가혹했습니다. "너희들은 새로운 임금을 부정하고 반란을 꾀했으니, 이는 역모다." 고문 속에서도 성삼문은 꿋꿋했습니다. "나의 임금은 오직 단종 전하뿐이시다. 세조는 찬탈자일 뿐이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도 사육신은 당당했습니다. 성삼문은 처형대 위에서 최후의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충성은 오직 단종 전하에게 있다. 백골이 진토되어도 이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 칼날이 내려오는 순간까지, 그들의 눈빛에는 굴복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육신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충절은 후대에 길이 기억되었습니다.
사육신의 처형 이후에도 단종을 향한 충성심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생육신이라 불리는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단종을 그리워했습니다. 세조는 결국 1457년, 단종을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영월로 유배 보냈습니다.
영월에서의 단종의 나날은 고독했습니다. 그는 홀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청령포 절벽에 서서 한양 방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내 여기서 생을 마치게 될 것인가..." 그리고 1458년 음력 10월, 열일곱 살의 단종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공식 기록으로는 병사라고 하지만, 백성들 사이에서는 "세조의 명으로 사약을 받았다"는 소문이, 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단종의 죽음 이후, 세조의 왕권은 더욱 굳건해졌지만, 그의 영혼은 편치 않았습니다. 밤마다 꿈에서 단종의 모습이 나타났고, 사육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세조는 이런 꿈을 떨쳐내기 위해 더욱 열정적으로 국정에 몰두했습니다. "내가 한 일은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나만이 세종의 뜻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세조는 자신을 설득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회한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 개혁군주로서의 면모와 업적
1458년 단종의 죽음 이후, 세조는 본격적으로 국정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그의 통치 방식은 선왕들과 확연히 달랐습니다. 세조는 즉위 초부터 왕권 강화에 노력했습니다. "왕의 권한이 약해져서는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 조정 회의에서 그의 말은 단호했습니다.
세조는 세종 때 마련된 의정부 체제를 육조직계제로 바꾸었습니다. 이제 모든 정무는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되었습니다. 신하들 중에는 이를 못마땅해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감히 목소리를 높이는 이는 없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권신들이 정치를 좌우하지 못할 것이다. 나라의 모든 결정은 왕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세조는 왕권 강화와 함께 국가 체제의 정비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세종대에 시작된 '경국대전' 편찬 작업을 본격화했습니다. 신숙주, 최항 같은 실무관료들은 밤낮없이 법전 편찬에 몰두했습니다. "이 법전은 조선의 근간이 될 것이다. 모든 법과 제도가 명확히 정리되어야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다." 세조의 말에 신하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편, 세조는 호패법을 정비하고 양전 사업을 벌여 국가 재정을 탄탄히 했습니다. 세금 제도도 개혁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국가 수입도 늘렸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군사 제도의 개편이었습니다. "나라의 안위는 강한 군대에 달려 있다." 세조는 직접 병서를 연구하며 군사 훈련 방식을 개선했습니다.
1460년, 세조는 '오위진관체제'라는 새로운 군사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이는 중앙군과 지방군을 효율적으로 연계시켜 외적의 침입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게 한 제도였습니다. "왜구의 침입이나 북방 여진족의 위협에 언제든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세조는 직접 군사 훈련을 참관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세조의 개혁은 학문과 기술 분야에도 미쳤습니다. 그는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더욱 널리 보급했습니다. 특히 불경을 한글로 번역한 '월인천강지곡'의 간행은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백성들이 글을 알아야 나라가 발전한다. 어려운 한자가 아닌, 우리 글로 소통해야 한다." 세조의 이런 노력은 백성들의 문해율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세조는 인쇄술 발전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금속활자인 '갑인자'를 주조하여 많은 책을 간행했습니다. '동국통감', '동문선' 같은 역사서와 문학서가 이 시기에 간행되었습니다. 세조의 문화 정책은 조선의 학문과 예술 발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1464년, 세조는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많은 것을 이루었소.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많소. 나라의 기틀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하오." 신하들은 세조의 업적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찬탈자라는 과거의 오명은 점차 개혁군주라는 새로운 평가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 불교 부흥과 인쇄술 발전
1464년 이후, 세조의 통치 스타일에는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왕권 강화와 국가 체제 정비를 위해 쉼 없이 달려온 그는 이제 깊은 사색에 빠지곤 했습니다. 창덕궁의 후원을 거닐던 세조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옳은 것인가..."
세조는 점차 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 불교는 억압받아왔지만, 세조는 이러한 기조를 뒤바꾸었습니다. "불교는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깨달음을 주는 가르침이다. 이를 막을 이유가 없다." 세조의 말에 신하들 중 일부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감히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1464년, 세조는 직접 '원각사'라는 대규모 사찰의 건립을 지시했습니다. 한양 도성 안에 들어선 이 사찰은 세조의 불교 부흥 의지를 상징했습니다. 공사 현장을 찾은 세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곳이 백성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모두가 평안을 찾길 바란다."
세조의 불교 장려 정책은 단순한 개인적 신앙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문화 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법화경', '능엄경' 등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했습니다. 특히 '월인천강지곡'은 불교 사상과 한글 보급을 동시에 이룬 걸작이었습니다. 세조는 직접 서문을 썼습니다. "이 경전이 널리 퍼져 모든 백성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길 바란다."
세조의 불교 부흥 정책과 함께 인쇄술도 크게 발전했습니다. 그는 갑인자보다 더 정교한 '을해자'를 만들어 많은 불경과 서적을 인쇄했습니다. 인쇄소에서 작업을 지켜보던 세조는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책은 지식을 전하는 매개체다. 더 많은 책이 만들어져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야 한다."
세조의 이러한 문화 정책은 조선의 지식 보급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한글로 번역된 불경들은 여성과 서민들도 쉽게 접할 수 있어, 문맹 퇴치와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세조는 종종 야간에 신하들과 불경에 대해 논하며 깊은 사색에 잠기곤 했습니다. "인생의 무상함과 권력의 허망함... 부처님의 가르침이 내 마음을 위로한다."
그러나 세조의 불교 부흥 정책은 양면성을 지녔습니다. 일부 신하들은 세조가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불교에 귀의했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임금께서는 과거의 행적을 참회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말은 결코 세조의 귀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1468년, 세조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는 종종 밤중에 소리쳤다고 합니다. "단종아, 네가 왔느냐..." 측근들은 이를 병세 때문이라고 했지만, 백성들 사이에서는 "세조가 단종의 원혼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병세가 깊어지는 가운데도, 세조는 국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후계자인 예종에게 당부했습니다. "나라의 기틀을 더욱 굳건히 하라.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들을 잘 활용하라." 세조의 눈에는 깊은 회한과 동시에 나라에 대한 걱정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선의 제7대 왕 세조는 복잡한 유산을 남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습니다.
※ 세조의 회한과 역사적 평가
1468년 가을, 창덕궁의 침소. 세조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56세의 나이였지만, 그의 얼굴은 훨씬 늙어 보였습니다. 오랜 질병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세조는 종종 한밤중에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습니다. "단종아, 네가 왔느냐..." 측근 내시들은 그저 묵묵히 임금의 곁을 지켰습니다.
세조는 병상에서도 국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왕세자 예종을 불러 당부했습니다. "나라의 기틀을 더욱 굳건히 하라. 세종의 뜻을 이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들을 잘 활용하라." 예종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세조의 눈에는 깊은 회한과 함께 나라에 대한 걱정이 서려 있었습니다.
세조의 통치 기간 동안, 조선은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왕권이 강화되고 법제가 정비되었으며, 국방과 문화가 융성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찬탈이었고, 이는 세조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었습니다. "내가 한 일이 옳았는가? 나라를 위한 결정이었지만, 그 죄책감은..."
세조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끼자, 신하들을 불러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를 화려하게 장사 지내지 말라. 내 묘는 소박하게 만들고, 지나친 의식은 생략하라." 이는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그의 죄책감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신하들은 고개를 숙이며 임금의 뜻을 따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468년 9월 23일, 세조는 마침내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조선 전역에 큰 슬픔을 안겼습니다. 정통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결국 조선의 기틀을 다진 명군으로 백성들의 기억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은 그의 유언대로 소박하게 치러졌습니다.
세조 사후, 그의 평가는 크게 엇갈렸습니다. 일부 사대부들은 여전히 그를 '찬탈자'로 비난했지만, 많은 이들은 그의 업적을 인정했습니다. 특히 그가 만든 '경국대전'과 '오위진관체제'는 조선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신숙주와 같은 실무관료들은 "세조는 진정한 군주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세조의 불교 부흥 정책도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한글로 번역한 불경들은 많은 백성들에게 읽혔고, 문화적 저변을 넓혔습니다. 비록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에서 불교는 다시 억압받게 되었지만, 세조 시대에 꽃피운 불교 문화는 오랫동안 남아 조선의 문화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세조의 죽음 이후에도, 단종과 사육신에 얽힌 이야기는 백성들 사이에서 계속 전해졌습니다. "세조가 죽기 전, 단종의 원혼이 나타나 그를 데려갔다"는 설화가 퍼졌고, 이는 세조에 대한 대중의 양가적 감정을 반영했습니다. 그는 찬탈자였지만, 동시에 나라를 발전시킨 명군이었던 것입니다.
※ 역사가 남긴 두 얼굴의 왕
조선 시대를 넘어 현대까지, 세조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쟁적입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마키아벨리적 군주'라고 부릅니다. 권력을 위해 비윤리적 수단을 사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를 단순히 '찬탈자'로 평가하며, 그의 통치가 정통성을 결여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세조의 양면성을 인정합니다. 그는 권력을 위해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찬탈자였지만, 동시에 조선의 기틀을 다진 명군이기도 했습니다. 세조 없이 조선의 발전을 논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만든 법과 제도는 조선 500년의 근간이 되었고, 그의 문화 정책은 조선의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단종과 사육신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백성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영월에 유배된 단종의 슬픈 이야기는 민간에서 구전되었고, 사육신의 충절은 후대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조는 단종을 복위시키고 사육신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조의 후손들은 세조의 업적을 이어 조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아들 예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아버지의 뜻을 이었고, 손자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조선의 법제를 완비했습니다. 세조가 닦은 기반 위에서 조선은 문화적,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세조의 유적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가 건립한 원각사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세워진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여전히 서울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또한 그가 간행한 수많은 불경과 서적들은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조의 흔적은 현대 한국에도 살아 있습니다.
역사는 때로 선과 악, 옳고 그름으로 단순하게 나눌 수 없는 복잡한 인물들을 만들어냅니다. 세조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찬탈자였지만 명군이었고, 단종의 숙부였지만 그의 왕위를 빼앗았으며, 유교 국가의 왕이었지만 불교를 부흥시켰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복합성이 세조를 역사 속의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조를 바라볼 때, 단순히 찬탈자나 명군이라는 한쪽 측면만을 보기보다는, 그의 복합적인 면모를 통해 역사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조의 이야기는 권력과 정통성, 업적과 윤리의 관계에 대해 우리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의 두 얼굴은 역사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거울이자,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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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세조, 찬탈자에서 명군으로'를 마칩니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찬탈자에서 조선의 기틀을 다진 명군으로 평가받는 세조의 양면적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권력을 위해 비윤리적 수단을 사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라 발전에 기여한 복잡한 인물 세조.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역사의 단순하지 않은 현실을 보여줍니다.
다음 편에서는 '예종의 단명한 왕권, 누가 그를 죽였나'를 다룰 예정입니다.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예종은 왜 단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을까요? 그를 둘러싼 미스터리와 그의 죽음 이후 벌어진 권력 투쟁, 그리고 그에 얽힌 음모론까지. 조선 제8대 왕 예종의 짧고 비극적인 삶을 파헤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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