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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거지왕, 낮의 정승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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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시대, 한양 도성의 밤거리를 지배하는 거지왕 매초식과 낮의 권력자 정승 홍상한의 운명적인 만남.
거지들의 세계와 양반들의 세계가 맞닿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의 세계에서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조선시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거지왕의 등장
한양 도성의 하늘에 달이 높이 떴습니다. 종로의 저잣거리는 이미 장이 파하고 깊은 고요 속에 잠겨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각, 좁디좁은 골목길 사이로 또 다른 세상이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누더기 옷자락을 휘날리며 한 사내가 골목을 걸어갑니다. 그의 이름은 매초식. 이 한밤의 거리를 지배하는 거지왕이었습니다. 찢어진 바지와 기워 입은 저고리. 하지만 그의 걸음걸이만큼은 한양 최고의 양반도 감히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당당했습니다.
매초식이 지나가자 길가에 웅크리고 있던 거지들이 하나둘 고개를 숙입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아닌, 존경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밤거리를 지나던 등짐장수 하나가 매초식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합니다.
"오늘 밤도 평화롭구나."
매초식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집니다. 달빛이 스며드는 골목길 사이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섭니다. 이곳이 바로 그의 왕국이었습니다. 낮에는 양반들의 세상이지만, 밤이 되면 이곳은 오직 매초식의 것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매초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습니다. 시장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습니다. 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소란이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감히 내 땅에서..."
매초식은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의 발소리가 밤거리에 울립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습니다. 밤의 거지왕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홍상한의 위기
달빛마저 스며들지 않는 좁은 골목. 정승 홍상한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느꼈습니다. 평소라면 수십 명의 하인과 호위군사를 거느리고 다니던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급한 일로 궁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레 나타난 자객들의 습격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정승 나리."
검은 복면을 쓴 자객들이 서서히 그를 옥죄어 왔습니다. 땅바닥에는 이미 홍상한을 지키려다 쓰러진 호위군사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살수들은 홍상한을 골목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그의 등 뒤로는 이미 높은 담장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이냐!"
홍상한이 호통을 쳤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습니다. 달빛 아래 번뜩이는 칼날이 그의 목을 겨눕니다. 자객들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정승님께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계시니 말입니다. 이제 그 지식을 무덤까지 가져가시면 되겠습니다."
홍상한은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그가 파헤치려 했던 비리 사건의 배후가 누구인지를. 하지만 이제는 그 진실을 영원히 묻어야 할 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살수들의 칼이 일제히 들어올려졌습니다. 홍상한은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양반님들, 여기서 뭘 하시나?"
어둠 속에서 들려온 한 마디에 모든 움직임이 멈췄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한기를 느낄 만큼 서늘했습니다.
운명적 만남
골목길 끝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누더기 옷을 걸친 사내였지만, 그 걸음걸이에는 귀한 양반도 따라올 수 없는 위엄이 서려있었습니다. 매초식의 등장에 자객들이 술렁입니다.
"거지 주제에 감히..."
자객 중 하나가 매초식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골목 여기저기서 수십 개의 그림자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거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와 낫이 들려있었고, 눈빛에는 매초식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했습니다.
"양반님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칼을 휘두르시나. 이곳은 내 땅이요. 허락 없이 피를 볼 순 없지."
매초식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속에 담긴 힘은 자객들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홍상한은 이 광경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거지들의 세계에도 이런 질서가 있다는 것을, 그는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거지들에게는 한양 땅 구석구석이 눈과 귀요. 양반님들의 검은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매초식의 말에 자객들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그들의 정체와 배후가 이미 거지들의 정보망에 포착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물러가시오. 오늘은 내가 이 정승님을 보호하겠소."
매초식의 선언에 자객들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적 열세도 있었지만, 그들의 정체가 탄로난다는 것이 더 큰 위협이었기 때문입니다.
"거지왕이라... 참으로 흥미롭구나."
홍상한이 매초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낮의 세상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정승과, 밤의 세상을 지배하는 거지왕.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협력의 시작
거지들의 아지트로 향하는 길은 그윽한 달빛 아래 이어졌습니다. 홍상한은 자신을 인도하는 매초식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누더기를 걸치고 있지만, 그 걸음걸이에는 범상치 않은 기품이 묻어났습니다.
"정승님께서는 지금 위험하시니, 제가 숨을 곳을 제공하겠습니다."
매초식의 말에 홍상한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거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대가 왜 나를 돕는 것이오?"
홍상한의 질문에 매초식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습니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고, 그 눈빛은 예상보다 더 깊은 지혜를 담고 있었습니다.
"거지들도 나라의 백성이지요. 나라를 위해 일하시는 정승님께서 죽임을 당하신다면, 그게 과연 백성을 위한 일이겠습니까?"
홍상한은 매초식의 대답에 놀랐습니다. 거지왕이라 불리는 이 사내가 단순한 부랑자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게다가 정승님을 노리는 자들의 정체... 저희가 이미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는 자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요."
매초식의 말에 홍상한의 눈이 커졌습니다. 그가 최근 파헤치려 했던 비리 사건의 진상을 거지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 거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귀와 눈이 있사옵니다. 양반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우리는 볼 수 있지요."
이윽고 그들은 좁은 골목을 지나 한 폐가 앞에 도착했습니다. 겉보기에는 버려진 집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이곳이라면 당분간 안전하실 것입니다. 정승님의 비리 척결이 마무리될 때까지, 저희가 보호하겠습니다."
홍상한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매초식을 신뢰하기로 한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가장 미천해 보이는 곳에서 가장 높은 지혜를 만날 수 있는 법. 그것이 홍상한이 이날 밤 깨달은 첫 번째 진리였습니다.
거지들의 세계
낡은 문이 열리자 홍상한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겉보기에는 버려진 듯한 폐가였지만, 그 안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숨어있었습니다.
수십 명의 거지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도성 곳곳에서 얻어온 정보를 전달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 정보를 종이에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다친 거지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놀라셨습니까, 정승님?"
매초식이 홍상한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도 나름의 질서가 있지요. 다만 양반들의 것과는 조금 다를 뿐입니다. 이곳은 정보를 모으는 곳이자, 아픈 이들을 치료하는 곳이며, 추위에 떠는 이들이 몸을 녹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홍상한은 거지들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관찰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관청의 관리들처럼 각자의 역할이 분명했고, 그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아이는 종로의 소식을 전하는 담당이고, 저쪽의 노인은 의원 일을 하다 몰락한 분입니다. 지금은 우리 거지들의 의원이 되어 다친 이들을 돌보고 계시지요."
매초식의 설명에 홍상한은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동안 그가 알고 있던 거지들의 모습은 얼마나 피상적이었던가요. 이들에게도 엄연한 질서와 체계가 있었고, 서로를 돕는 정이 있었습니다.
"매일 밤, 우리의 눈과 귀가 되는 이들이 한양 전역에서 정보를 가져옵니다. 양반들의 비리부터 백성들의 고통까지... 이곳에 모이지 않는 이야기가 없지요."
그때였습니다. 한 젊은 거지가 급하게 뛰어들어왔습니다.
"왕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조태억 대감의 움직임에 대해 알고 싶어 하십니다."
매초식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거지왕의 정보망은 이미 조정의 높은 곳까지 뻗어있었던 것입니다.
"보셨나요, 정승님? 이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비록 거지이지만, 우리도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습니다."
홍상한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이제 이해했습니다. 왜 매초식이 거지왕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가 이토록 많은 거지들의 충성을 받고 있는지를.
음모의 실체
깊어가는 밤, 거지들의 아지트에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곳곳에서 정보를 전하는 발자국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매초식의 얼굴에는 깊은 고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드디어 모든 실마리가 하나로 모였습니다."
매초식이 홍상한 앞에 한 장의 종이를 펼쳤습니다. 그 위에는 조태억의 이름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복잡한 관계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조태억은 지난 3년간 비밀리에 사조직을 만들어왔습니다. 그자의 속내는 정승님을 제거하고 영의정 자리를 노리는 것이었지요."
홍상한의 눈이 커졌습니다. 그는 최근 조태억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정보를..."
"양반들은 거지 앞에서 모든 말을 합니다. 그들 눈에는 우리가 그저 길거리의 쓰레기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강점이 되었지요."
그때, 한 거지가 급하게 들어왔습니다. 그의 손에는 또 다른 문서가 들려있었습니다.
"왕께서! 조태억 대감이 궁 안의 나인들까지 매수했다는 증거를 찾았습니다!"
매초식은 그 문서를 받아들고 빠르게 눈으로 훑었습니다. 그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습니다.
"정승님, 이건 큰일입니다. 조태억이 중전마마의 세력까지 끌어들이려 했던 모양입니다. 만약 그가 성공했다면..."
홍상한은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중전의 세력까지 등에 업은 조태억은 단순히 영의정 자리뿐만 아니라, 더 큰 것을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진 모든 정보를 하나로 모아야 할 때입니다. 정승님, 이 싸움은 단순히 당신의 목숨을 구하는 것을 넘어섰습니다. 이제는 나라의 안위가 걸린 일이 되었습니다."
매초식의 말에 홍상한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밤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창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큰 싸움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계략을 짜다
아지트의 깊숙한 방에서 홍상한과 매초식이 마주 앉았습니다. 낡은 등잔 하나가 그들의 얼굴을 어스름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창밖으로는 새벽이 오려는지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습니다.
"거지들의 힘을 빌려주시겠습니까?"
홍상한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더 이상 거지왕을 대하는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매초식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습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앞으로 거지들을 함부로 대하는 관리들을 단속해주십시오. 우리도 이 나라의 백성입니다. 비록 누더기를 걸치고 있지만, 우리에게도 사람다운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홍상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동안 그는 거지들의 존재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습니다.
"그것뿐이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가 찾아낸 정보로 조태억을 몰아내고 난 뒤, 그의 자리에 새로 앉을 자가 또다시 탐욕을 부리지 않도록 지켜봐 주십시오.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의 움직임을 감시할 것입니다."
홍상한의 눈이 커졌습니다. 매초식은 단순히 당장의 이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약속하겠소.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당신의 거지들은 더 이상 함부로 대우받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홍상한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습니다.
"나 역시 권력을 가진 자들이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감시하겠소. 이것이 바로 내가 정승의 자리에 있는 이유니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깊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낮과 밤의 세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진정한 동맹이 맺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정승님. 우리는 조태억의 모든 것을 파헤칠 것입니다. 그자의 발걸음 하나, 만나는 사람 하나까지 모조리 감시할 것입니다."
매초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습니다. 그의 모습에서는 이제 더 이상 거지의 초라함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사명을 위해 움직이는 한 사람의 강인한 의지만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역습의 시작
나흘째 되는 밤이었습니다. 한양 도성의 거지들이 그림자처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매초식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도성 곳곳에 흩어져 조태억의 모든 움직임을 감시했습니다.
"대감께서 또 궁 밖 사랑채로 가셨습니다."
열 살배기 거지 아이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습니다. 매초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내려갔습니다.
"자정이 넘어 누군가를 몰래 만나셨다 하옵니다. 검은 도포를 걸친 사내였다고..."
이번에는 늙은 거지가 전해 온 소식이었습니다. 매초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습니다.
"진현문 근처의 술집에서는 조태억 대감의 수하들이 술에 취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곧 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정보가 모일수록 조태억의 그림자는 점점 더 검게 변해갔습니다. 매초식은 이 모든 정보를 홍상한에게 전달했고, 홍상한은 그것을 바탕으로 조태억의 약점을 하나둘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영춘당 뒤편에서 대감께서 수상한 궤짝을 옮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거지가 전하는 소식에 매초식의 귀가 쫑긋 섰습니다. 그는 즉시 두 명의 거지를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그 궤짝 안에는 분명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을 터. 한시도 눈을 떼지 마라."
거지들은 밤이면 그림자가 되어 조태억의 발걸음을 쫓았고, 낮이면 거리의 더미나 처마 밑에 숨어 그의 행적을 감시했습니다. 그들의 눈과 귀는 한양 도성 구석구석에 퍼져있었고, 아무리 작은 소문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매초식님, 큰일입니다!"
갑자기 한 거지가 급하게 뛰어들어왔습니다.
"조태억 대감께서 중전마마의 친정과 접촉했다는 소식입니다. 궁 안의 나인이 전해주었습니다."
매초식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결정적인 증거를 잡은 것입니다.
"홍 정승께 전하라. 조태억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이제 우리가 그를 몰아낼 때가 왔다고..."
달빛이 구름에 가려진 그날 밤, 거지들의 정보망은 마침내 조태억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습니다.
정의의 심판
새벽녘, 매초식은 홍상한을 찾아갔습니다. 그의 품에는 누런 종이 뭉치가 가득했습니다. 열흘 동안 거지들이 모은 모든 증거가 담겨있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조태억의 비리 증거입니다."
매초식이 하나씩 종이를 펼쳐 보였습니다. 홍상한의 눈이 점점 커졌습니다.
"이 장부는 조태억이 뇌물로 받은 은자의 기록입니다. 그가 비밀리에 만나던 상인들에게서 받아낸 것이지요. 우리 거지 중 한 명이 그의 사랑채 마루 밑에서 찾아냈습니다."
홍상한은 장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조태억이 관직을 팔아넘긴 대가로 받은 뇌물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건... 조태억이 중전마마의 친정과 주고받은 편지입니다. 궁 안의 나인이 몰래 빼내 준 것입니다. 그들과 결탁하여 조정의 대소사를 좌지우지하려 했던 증거이지요."
매초식이 또 다른 서신을 내밀었습니다. 거기에는 조태억의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매초식이 마지막으로 꺼낸 것은 작은 비단 주머니였습니다. 그 안에는 조태억이 사용하던 도장과 숨겨둔 비밀 문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자가 영의정 자리를 노리며 세력을 모으는 과정에서 써내려간 모든 계획이 담겨있습니다. 심지어는... 정승님을 해하려 했던 계획까지도요."
홍상한은 한참 동안 침묵했습니다. 그의 앞에 놓인 증거들은 너무나 완벽했습니다. 이것이면 조태억을 영원히 조정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매초식 그대... 어찌 이런 것들을 모두..."
"거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사옵니다. 아무도 거지를 주목하지 않기에, 오히려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요. 양반들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진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홍상한의 눈에서 감동의 빛이 번졌습니다. 그는 이제 진정으로 매초식과 거지들의 가치를 이해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입니다."
매초식이 말했습니다.
"이 증거들을 가지고 임금님께 가시지요. 이제는 조태억의 악행을 세상에 드러낼 때입니다."
승리의 순간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밝아올 무렵, 창덕궁 인정전에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영조 임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전각을 울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냐?"
임금의 손에는 홍상한이 올린 증거들이 들려있었습니다. 조태억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전하, 이는 모두 모함이옵니다! 소인을 해하려는 자들의 음모가 분명..."
"모함이라 하였느냐?"
홍상한이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의 손에는 또 다른 문서가 들려있었습니다.
"이는 대감께서 직접 도장을 찍으신 비밀 문서이옵니다. 중전마마의 친정과 결탁하여 조정을 좌지우지하려 했던 증거이며, 심지어 신을 해하려던 계획까지 상세히 적혀있사옵니다."
조태억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문서를 바라보며 말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이 장부에는 대감께서 관직을 팔아 은자를 챙기신 내역이 모두 기록되어 있사옵니다. 상인들에게서 받으신 뇌물의 액수까지..."
임금의 안색이 점점 험악해졌습니다. 조태억은 이제 더 이상 변명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전하! 이는... 이는..."
"입을 다물라!"
임금의 호통이 인정전을 가득 채웠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인 척 가장하고 이토록 큰 악행을 저지르다니... 당장 의금부로 끌고 가라!"
의금부 도사들이 조태억을 붙잡아 끌고 나갔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과 공포가 가득했습니다.
홍상한은 승리의 미소를 감추며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성공의 뒤에 거지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달빛 아래 한양 거리를 누비며 정의를 위해 싸웠던 거지들의 이야기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채 사라져갔습니다.
멀리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동맹
달이 뜬 밤, 홍상한은 다시 거지들의 아지트를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더 이상 숨어서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조태억은 이미 의금부에 갇혔고, 그의 모든 세력은 뿌리째 뽑혔기 때문입니다.
"정승님께서 이런 곳까지 직접 찾아오시다니."
매초식이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습니다. 그의 누더기 옷차림은 여전했지만, 이제 홍상한의 눈에는 그 누더기 속에 숨은 고귀한 정신이 보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를 돕는 동반자가 된 것이군요."
홍상한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보자기가 들려있었습니다.
"이것은 조태억의 재산을 몰수한 것 중 일부입니다. 거지들을 위해 써주시오."
매초식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리, 우리는 돈이 필요해서 이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 약속하신 대로만 해주십시오. 거지들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홍상한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이제 이해했습니다. 매초식과 그의 거지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닌, 인간다운 대우였다는 것을.
"낮과 밤이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이지요."
매초식의 말에 홍상한도 미소를 지었습니다. 달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저희는 계속해서 눈과 귀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조정에 또다시 조태억 같은 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그대의 그 마음이면 충분하오. 나 역시 약속하지요. 이제부터 거지라 하여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달랐지만, 마음만큼은 하나였습니다. 한양 도성의 밤과 낮을 지키는 두 수호자의 우정이 깊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야기의 끝
세월이 흘러 영조 시대의 이야기는 차츰 잊혀져 갔습니다. 하지만 한양 도성의 오래된 골목길에서는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달 밝은 밤이면 거지왕 매초식과 그의 무리들이 도성을 순찰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천대받는 거지가 아닌, 백성들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관리들의 비리를 감시하고, 억울한 백성들의 사연을 듣고, 때로는 그들의 목소리를 정승 홍상한의 귀에 전했다고 합니다.
홍상한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거지들은 더 이상 함부로 대우받지 않았고, 오히려 도성의 숨은 공헌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관리들은 이제 거지들을 마주치면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곤 했다고 합니다.
매년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홍상한은 홀로 거지들의 아지트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매초식과 마주 앉아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지요. 낮의 세상을 이끄는 정승과 밤의 세상을 다스리는 거지왕... 그들의 우정은 오랫동안 한양의 평화를 지켰습니다.
세월이 흘러 매초식과 홍상한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이야기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달빛이 스며드는 좁은 골목길에서, 때로는 장터의 술집에서, 때로는 양반들의 사랑방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힘은 겉모습이 아닌 마음에서 나온다고...
정의는 때로 가장 뜻밖의 곳에서 피어난다고...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고...
밤이 깊어갈 때면 아직도 한양의 오래된 골목길에서는 거지왕 매초식과 정승 홍상한의 이야기가 속삭여진다고 합니다. 달빛이 스며드는 처마 끝에서, 그들의 전설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유튜브
지금까지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숨은 이야기, '밤의 거지왕: 낮의 정승을 만나다'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겉모습은 달라도 같은 뜻을 품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에도 깊은 울림을 주었기를 바랍니다.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함께 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도 꼭 들려주세요.
다음 편에서 만나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