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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지들의 밤: 한양 뒷골목의 숨겨진 세계

    태그

    사극, 역사, 뒷골목, 거지, 조선시대, 생존, 연대, 계급, 비리, 암투, 비밀조직, 인간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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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기, 한양의 화려한 대로 뒤에 숨겨진 거지촌의 이야기. 거지왕 거성이 이끄는 비밀 조직 '야맹(夜盲)'은 낮에는 구걸하며 살아가지만, 밤이 되면 한양의 모든 비밀을 수집하는 정보망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새로운 포도대장의 부임과 함께 거지들의 은밀한 세계가 위협받기 시작하고, 거성은 조직의 생존과 자신의 비밀스러운 과거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후킹멘트

    "세상은 우리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지." 한양의 화려한 궁궐과 번화가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세계, 거지들의 왕국이 밤을 지배한다. 하루 종일 구걸하며 무시당하는 이들이 밤이 되면 한양에서 가장 값진 것—정보를 거래하는 그림자 세력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가 새로운 위협에 노출되면서, 거지왕 거성은 자신의 숨겨진 과거와 마주해야만 한다.

    1: 한양의 거지왕 거성이 거지촌을 통솔하며 각 구역 두목들에게 정보 수집 임무를 배분

    한양 도성 남쪽, 청계천이 굽이치는 모퉁이의 낡은 창고. 밖에서 보면 버려진 듯 보이는 이곳은 밤이 되면 '야맹'의 본거지로 변모했다. 비가 내리는 초겨울 밤, 거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앉은뱅이, 외눈박이, 불구자들도 있었지만, 멀끔한 얼굴에 멀쩡한 몸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낮과 밤의 얼굴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왕께서 오신다!"

    나무 다리를 짚은 노인의 외침과 함께 창고 안이 조용해졌다. 갑자기 천장에서 한 인영이 밧줄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그는 40대 초반의 건장한 사내였다. 다른 거지들과 달리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움직임은 민첩했다.

    "한양의 밤이 깊어간다."

    거성이 말하자 모인 거지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우리의 눈은 더 밝아집니다."

    거성은 중앙의 나무 상자 위에 올라섰다. 거지들이 그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앉았다. 구역별 두목들, 약 열다섯 명이 가장 앞줄에 자리했다.

    "북촌, 남촌, 동촌, 서촌에서 온 형제들이 모두 모였나?"

    "네, 왕님. 죽은 자리의 두목만 오지 않았습니다."

    앞줄에 앉은 외눈박이 노인이 대답했다. '죽은 자리'는 형장터 근처 거지들의 구역을 일컫는 은어였다.

    "무슨 일인가?"

    "관군의 단속이 심해 몸을 숨겼다 합니다."

    거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새로운 포도대장 부임과 관련 있을 테지.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

    그는 천천히 걸어 다니며 각 두목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북촌 담당 꼬마야, 내일은 한성부 판윤 댁 주변에 더 많은 눈을 배치해라. 그의 딸 혼담이 오가는데, 이면에 정치적 거래가 있다고 한다."

    앞니가 빠진 어린 두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촌의 독수리, 내일 성균관 유생들의 집회가 있을 테니 귀를 열어두고 있어라. 특히 김석중이란 유생을 주시해라."

    "남촌의 칠성, 최근 사라진 비단 상인에 관한 소문 있느냐?"

    한쪽 다리가 없는 중년 사내가 답했다. "네, 왕님. 그자는 살아있습니다. 광주로 도망쳤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거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 두 개를 칠성에게 던졌다.

    "모두 명심해라. 우리는 구걸만 하는 거지가 아니다. 우리는 야맹이다. 보이지 않는 밤의 눈이다."

    비가 창고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거성은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을 무시한 채 계속 지시를 내렸다.

    "무엇보다 오늘부터 포도청 주변에 더 많은 귀와 눈을 배치한다. 새 포도대장이 부임했다 했지?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한다."

    두목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성은 작은 주머니들을 꺼내 각 두목에게 나눠주었다. 그 안에는 정보 수집에 필요한 동전과 특정 장소의 출입을 위한 표식들이 들어있었다.

    "해가 뜨기 전에 모든 정보를 모아오라. 야맹의 밤이 시작됐다."

    거지들은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어둠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고 체계적이었다. 한양의 밤은 이제 그들의 시간이었다.

    2: 낮에는 구걸하며 무시당하던 거지들이 밤이 되자 각자의 위치에서 양반, 상인, 관리들의 비밀 정보를 수집

    한양의 저녁이 깊어갔다. 도성의 종소리가 울리고 관리들이 거리에서 "국을 파요!"를 외치는 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으로 향했지만, 거지들의 진짜 일과는 이제 시작이었다.

    북촌의 양반가 근처, 낮에는 구부정한 몸으로 구걸하던 '꼬마'가 담벼락 근처로 다가갔다. 그의 움직임은 이제 낮과 달리 민첩했다. 담벼락 위로 가볍게 뛰어오르자, 안채에서 흘러나오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판서 나리, 삼남 지방 수령 자리 몇 개가 곧 비게 됩니다. 특히 경상도 청하현 현감 자리가..."

    꼬마는 눈을 감고 모든 대화를 기억했다. 이 정보는 내일 아침 다른 거지들에게 전해질 것이고, 결국 거성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남촌의 주막에서는 '칠성'이 취객인 척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주막 앞을 지나가는 상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다음 달 평안도에서 내려오는 인삼이 평소보다 반으로 줄 거라네."
    "그렇다면 값이 오르겠군. 지금 사재기해야..."

    칠성은 작은 나무 조각에 칼로 몇 개의 표시를 새겼다. 정보의 가치를 나타내는 암호였다.

    서촌의 '독수리'는 더 과감했다. 그는 밤이 되자 낮의 넝마를 벗고 하인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정보 수집을 위해 몇 달 전부터 준비한 잠입이었다. 유생의 집 마당에서 그는 물동이를 나르며 귀를 기울였다.

    "조정에서 조만간 큰 인사이동이 있을 것이오. 우의정이 바뀐다는 소문도..."
    "그럼 우리 성균관도 영향받겠군요. 새로운 대사성 인선이..."

    독수리는 머릿속에 모든 정보를 저장했다. 그의 특기는 한 번 들은 것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었다.

    형장터 근처, '죽은 자리'의 두목은 포도청 담장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포도대장의 집무실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자가 누굴까... 왜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지?"

    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나왔다. 새로 부임한 포도대장 서준이었다. 죽은 자리 두목은 어둠 속에 더 깊이 몸을 숨겼다.

    서준은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마치 어둠 속 거지를 찾아내려는 듯했다. 죽은 자리 두목은 숨을 죽였다.

    "누구냐!"

    서준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두목은 놀라 뒤로 물러났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 근처에 누가 있지?"

    죽은 자리 두목은 재빨리 땅에 엎드려 술에 취한 거지 행세를 했다. 서준이 그를 발견하고 발로 툭 건드렸다.

    "이런, 취한 거지구나."

    서준은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두목은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지만, 새 포도대장의 날카로운 감각이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거지들은 더 많은 정보를 모았다. 궁궐 주변의 한 거지는 궁녀의 옷을 빨래하는 물가에서 흘러나온 왕실 소식을, 시전 근처의 거지는 상인들의 밀거래 정보를, 각 관청 주변의 거지들은 관리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이른 새벽, 물레방아 사랑방에 모이는 거지들을 통해 거성에게 전달될 것이다. 한양의 모든 소문과 비밀이 야맹을 통해 흐르고 있었다.

    청계천 다리 밑, 거성은 혼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조그만 종이 쪽지가 들려 있었다.

    "새 포도대장... 서준..."

    그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이름만으로도 그에게 의미가 있는 이름이었다.

    3: 새로 부임한 포도대장 서준이 거지들의 조직적 활동을 의심하며 거성의 정체를 파헤치려 조사

    포도청 집무실, 서준은 책상 위에 펼쳐진 한양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붉은 먹으로 표시된 점들이 도성 곳곳에 찍혀 있었다. 그가 부임한 지 보름 동안 발견한 거지들의 주요 활동 지역이었다.

    "대장님, 부르셨습니까?"

    문이 열리고 그의 심복 김도삼이 들어왔다. 서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도삼아, 최근 거지들의 움직임이 이상하지 않은가?"

    김도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거지들이요? 그저 구걸하며 다니는..."

    "아니야." 서준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난 며칠간 관찰한 바로는,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 체계적이다. 마치... 조직적인 활동 같아."

    서준은 지도를 가리켰다. "보아라. 중요한 관청, 양반가, 상인들의 집결지 근처에 항상 같은 거지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들은 무언가를 감시하고 있어."

    김도삼이 다가와 지도를 살펴보았다. "혹시... 절도나 강도를 위한 사전 답사일까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만약 그렇다면 이미 여러 건의 범죄가 일어났어야 하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그들은 계속해서 같은 장소만 지키고 있어."

    "그럼 무엇을 하는 걸까요?"

    "정보를 모으고 있다고 생각해." 서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한양의 모든 소문과 비밀을 수집하는 거야. 그리고 그 정보는 누군가에게 전달되겠지."

    "누구에게 말입니까?"

    "거지왕... 거성이라 불리는 자다." 서준은 책상으로 돌아와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임 포도대장의 기록에 따르면, 약 5년 전부터 거지들 사이에 이 인물이 등장했다고 한다. 신원은 불명. 출신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거지들을 통솔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김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체포해야 하지 않을까요?"

    "문제는 그를 찾을 수 없다는 거야." 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거지들 중 누구도 그의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없거나, 알더라도 입을 열지 않아. 마치 유령 같은 존재지."

    서준은 다시 지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그를 찾아낼 것이다. 그가 이렇게 조직적으로 정보를 모으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어떻게 진행하실 계획입니까?"

    서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오늘 밤, 우리도 그들의 방식을 써 보자. 거지 행세를 할 사람 다섯을 선발해. 가장 정보가 많이 오갈 법한 장소에 배치할 것이다."

    "넵!"

    김도삼이 나가자, 서준은 책상 서랍에서 낡은 비단 조각을 꺼냈다. 그것은 오래된 옷자락의 일부였다.

    "이제 드디어... 진실을 밝힐 때가 왔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이것은 단순한 공무가 아니었다. 개인적인 복수이자 오래된 의문을 풀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날 밤, 포도청 군사들이 변장하여 한양 곳곳에 흩어졌다. 그들은 거지 행세를 하며 야맹의 활동을 감시했다. 그러나 야맹의 거지들은 이미 이 사실을 눈치챘다. 그들의 정보망은 포도청 내부까지 미치고 있었다.

    청계천 다리 밑, 거성은 측근들로부터 포도청의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왕님, 포도대장이 우리를 쫓고 있습니다. 오늘 밤 가짜 거지들이 도처에 배치되었습니다."

    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복잡했다.

    "서준... 오랜 친구, 아니면 숙적이라 해야 할까. 드디어 나를 찾아왔구나."

    주변의 거지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거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모든 정보 활동을 축소한다. 포도청의 감시가 느슨해질 때까지 잠시 숨을 때다."

    4: 거성과 서준의 첫 대면, 서로의 목적을 숨긴 채 신경전을 벌이며 각자의 비밀스러운 과거가 암시

    한양 남부시장, 어둠이 깔린 저녁 무렵. 장사치들이 하나둘 짐을 정리하고 귀가하기 시작했다. 포도대장 서준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시장의 한 구석에 있는 주막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뒤로 김도삼이 조심스럽게 따랐다.

    "대장님, 정말 혼자 들어가시겠습니까? 위험할 수 있습니다."

    "걱정 마라. 내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네가 군사들을 이끌고 들어오면 된다."

    서준은 주막 앞에서 잠시 멈췄다. '취한 까마귀'라는 낡은 간판이 바람에 삐걱거렸다. 이곳은 거지들이 자주 드나든다는 정보를 입수한 곳이었다.

    주막 안으로 들어서자 희미한 등불 아래 술 취한 이들과 행상인들이 뒤섞여 있었다. 서준은 구석 자리에 앉아 동이를 주문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은 주막 안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때, 주막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다른 손님들과 달리 그는 비교적 깔끔한 차림이었지만, 서준의 눈에는 그의 걸음걸이에서 미묘한 불일치가 느껴졌다. 평소에는 다른 걸음으로 걷는 사람이 연기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사내는 주모에게 무언가 속삭인 후, 정확히 서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포도대장 나리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시다니, 영광이군요."

    서준의 눈이 커졌다. 그는 변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내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대는..."

    "저는 그저 시장의 상인일 뿐입니다." 사내가 미소지었다. "하지만 대장님께서는 저를 '거성'이라 부르고 싶으실 테지요."

    서준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그가 찾던 인물과 마주한 것이다. 그는 거성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40대 초반,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왼쪽 귀 아래의 희미한 상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한양의 거지들을 통솔하는 자가 당신인가?"

    "통솔이라... 거창한 표현이군요. 저는 그저 불쌍한 이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은 것뿐입니다."

    서준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한양 전체에 정보망을 구축하고, 관리들과 양반들의 비밀을 캐내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인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권력이 있지요. 하나는 대장님처럼 드러난 권력, 또 하나는 저희처럼 숨겨진 권력. 둘 다 필요한 것 아닐까요?"

    두 사람의 대화는 격식을 갖추었지만, 그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거성이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20년 전 자하문 근처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서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것은 그의 과거와 연관된 민감한 사건이었다.

    "어떻게 그 일을..."

    "저희는 정보를 다루는 자들입니다." 거성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날 밤 일어난 일, 그리고 그 후 대장님이 걸어온 길...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서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은 누구지? 정말 단순한 거지왕인가, 아니면..."

    "저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명일 해질녘에 죽은 자리를 찾아오십시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거성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돌아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래전 잃어버린 것을 찾고 계시다면, 어쩌면 저희가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서 도령."

    서준은 충격에 빠졌다. '서 도령'은 20년 전, 그가 양반 집안의 아들이었을 때 불리던 이름이었다. 거성이 사라진 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그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날 밤의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주막 밖, 어둠 속에서 거성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표정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20년만의 재회로군... 하지만 넌 날 알아보지 못했어, 서준아."

    5: 궁궐 내 권력 다툼에 관한 중요 정보를 둘러싸고 거지 조직 내부에서 배신과 암투

    거성과 서준의 만남 이후, 야맹 내부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죽은 자리의 두목인 '송곳'은 청계천 저녁 모임에서 미심쩍은 눈빛으로 거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진 후, 그는 동촌 두목인 '칠성'을 따로 불러 세웠다.

    "포도대장과 왕이 단둘이 만났다는 얘기가 사실인가?"

    칠성은 주변을 살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으로 직접 봤네. 취한 까마귀 주막에서 두 시진 넘게 이야기를 나눴어."

    "수상한 일이군." 송곳이 턱을 문질렀다. "우리 왕이 관헌과 비밀리에 접촉하다니... 혹시 우리를 팔아넘기려는 건 아닐까?"

    칠성은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왕을 의심하는 건가? 그동안 우리를 이끌어준 은혜를..."

    "은혜?" 송곳이 비웃었다. "그저 서로 이용하는 관계일 뿐이야. 그가 우리를 통해 정보를 얻고, 우리는 그의 보호 아래 구걸하며 살아가는 거지. 하지만 이제 포도청이 우리를 쫓고 있어. 만약 거성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우리를 희생시킨다면?"

    송곳의 말에 칠성의 표정이 변했다. 다른 두목들도 비슷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야맹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음 날 밤, 거성은 평소처럼 정보를 취합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가장 신뢰하는 부하인 '꼬마'가 급히 달려왔다.

    "왕님! 큰일 났습니다! 송곳이 다른 두목들을 모아 비밀 회합을 갖고 있습니다."

    거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장소는?"

    "옛 활터 창고입니다. 이미 여섯 명의 두목이 모였습니다."

    거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하필 지금..."

    그때 또 다른 정보원이 들어왔다. "왕님! 중요한 정보입니다. 궁 안에서 큰 움직임이 있습니다. 대비마마와 영의정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자세히 말해보아라."

    "대비마마가 비밀리에 병조판서를 만나셨다고 합니다. 영의정을 실각시킬 계획을 논의했다는 소문이..."

    거성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은 중대한 정보였다. 조정의 권력 구도가 바뀔 수 있는 정보였다.

    "확실한가?"

    "세 명의 서로 다른 정보원이 확인했습니다. 병조판서 댁 하인, 궁녀, 그리고 대비마마의 시녀를 통해..."

    거성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 정보는 엄청난 가치가 있었지만, 지금은 내부 분열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꼬마, 지금 바로 활터 창고로 가라. 두목들에게 내가 곧 가겠다고 전해라."

    그러나 꼬마가 막 떠나려던 순간, 창고 문이 거칠게 열렸다. 송곳이 십여 명의 거지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움직이지 마, 거성!"

    거성은 냉정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송곳아."

    "네가 우리를 배신했어!" 송곳이 소리쳤다. "포도대장과 밀담을 나누고, 우리를 희생시키려는 계획을... 모두 알고 있다!"

    거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오해를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난 절대 야맹을 배신하지 않았다."

    "거짓말 마! 네 정체는 뭐지? 대체 왜 포도대장을 만난 거야?"

    송곳의 눈에는 의심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는 품 안에서 칼을 꺼냈다.

    "오늘 네 정체를 밝히겠어. 아니면..." 송곳이 칼끝으로 거성의 목을 겨눴다.

    바로 그때, 창고 뒤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포도청이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혼란이 일어났다. 송곳과 그의 무리들은 당황했고, 거성은 이 틈을 타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창고 벽에 걸린 등불을 떨어뜨려 어둠을 만들어냈다.

    "모두 흩어져라!" 거성이 외쳤다.

    어둠 속에서 도망치는 거지들, 그리고 그들을 쫓는 포도청 군사들. 거성은 천장의 구멍을 통해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야맹은 둘로 갈라졌고, 그가 쌓아온 모든 것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6: 위기에 처한 야맹 조직을 구하기 위해 거성이 자신의 비밀스러운 신분을 희생하고, 서준과 거지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

    한양 외곽, 폐허가 된 절터. 거성은 이곳에 남은 충직한 야맹 조직원들을 모았다. 송곳의 반란과 포도청의 급습으로 거지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많은 이들이 체포되었다. 야맹의 위기였다.

    "왕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꼬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송곳이 이끄는 무리들이 우리의 모든 은신처를 포도청에 밀고했습니다."

    거성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남은 건 20명 남짓, 그나마도 대부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는 결심한 듯 품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이제 시간이 왔구나..."

    그가 주머니를 풀자 반지 하나가 나왔다. 그것은 오래된 것이었지만, 선명한 문양이 새겨진 비취 반지였다.

    "왕님, 그것은..." 오랫동안 거성을 따라온 노인 거지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내 진짜 정체를 밝힐 때가 왔다." 거성이 천천히 말했다. "나는 20년 전, 자하문 참사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백운거사의 아들이다."

    모든 이들이 충격에 빠졌다. 백운거사는 20년 전 역모 누명을 쓰고 가족과 함께 처형된 귀족이었다.

    "내 본명은 백도원. 그날 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거지들의 도움으로 숨어살았다. 그리고 이제... 서준을 만날 시간이다."

    "포도대장을요?" 꼬마가 당황해 물었다. "그는 우리의 적이잖습니까!"

    거성... 아니 백도원은 쓸쓸하게 웃었다. "아니다. 그는 내 죽마고우였다. 같은 마을에서 자란 형제나 다름없었지. 그리고 그날 밤, 우리 가족이 참화를 당했을 때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는 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포도대장을 만나러 가겠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라."

    "안 됩니다!" 여러 거지들이 동시에 외쳤다. "함정일 수 있습니다!"

    "내 선택이다." 백도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야맹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한양 포도청, 서준은 체포된 거지들의 명단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직 거성은 잡히지 않았군."

    그때 문이 열리고 김도삼이 황급히 들어왔다. "대장님! 거성이... 아니, 백도원 대감이 자수하러 왔습니다!"

    서준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백도원이라고?"

    그가 밖으로 나가자, 마당에는 백도원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거지왕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자세와 눈빛은 양반가의 기품을 되찾은 듯했다.

    "오랜만이구나, 서준아."

    서준은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제 보니 그가 옛 친구임을 알 수 있었다.

    "도원... 정말 너였구나. 네가 살아있었다니..."

    백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너의 아버지가 나를 숨겨주셨지. 하지만 나머지 가족은 구하지 못했어."

    서준의 눈에 슬픔이 어렸다. "내 아버지가... 그런 일을..."

    "그렇다. 그리고 이제 난 모든 진실을 밝히러 왔다. 내 가족이 역적으로 몰린 진짜 이유, 그리고 지금 궁궐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 다툼의 진실까지."

    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주변의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물러가라. 나는 백도원 대감과 단독으로 대화하겠다."

    군사들이 물러나자, 두 사람은 집무실로 향했다.

    "내가 가진 정보를 들려주마." 백도원이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무엇인가?"

    "야맹의 거지들을 풀어주고, 그들을 더 이상 쫓지 마라. 그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불쌍한 이들일 뿐이다."

    서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들을 풀어주겠다. 하지만 정보 활동은 중단해야 한다."

    "그럴 필요 없다." 백도원이 미소지었다. "오히려 그들을 활용하라. 한양의 구석구석을 아는 그들은 포도청에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서준의 눈이 빛났다. "그것은... 좋은 생각이군."

    두 사람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백도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서준에게 전했고, 서준은 그에게 20년간의 진실을 들려주었다.

    다음 날 아침, 체포된 모든 거지들이 풀려났다. 그들은 놀랍게도 포도청으로부터 특별한 제안을 받았다. 포도청의 비공식 정보원으로 일하는 대가로 보호와 생계를 보장받는 것이었다.

    송곳을 비롯한 반란 세력도 용서받았다. 백도원... 아니, 거성의 배려였다.

    한 달 후, 한양의 거리. 여전히 거지들은 구걸하며 살아갔지만, 그들의 눈과 귀는 이제 한양의 치안을 위해 일했다. 야맹은 포도청의 그림자 조직이 되었고, 서준은 그들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한양의 범죄를 효과적으로 다스렸다.

    거성은 공식적으로는 백운거사의 아들 백도원으로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밤이면 거지촌을 찾아 그들과 함께했다. 그는 두 세계 사이의 다리가 되었다.

    "형님, 새로운 거지왕은 누가 될까요?" 어느 날 밤, 개똥이라는 젊은 거지가 백도원에게 물었다.

    백도원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될 거다, 개똥아. 이제 야맹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테니."

    개똥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가요? 하지만 저는..."

    "거지의 왕은 태생이 아니라 마음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네 마음은 이미 모두를 위하고 있지."

    백도원은 개똥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한양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의 복수는 끝났고,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지들의 밤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한양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갔지만, 이제 그 그림자는 도시를 지키는 힘이 되었다. 가장 밑바닥에서 세상을 올려다보는 이들이 때로는 가장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진리처럼.

    엔딩멘트

    한양의 화려한 대로에서 멀지 않은 곳, 거지들의 왕국은 여전히 건재했다. 거성의 희생으로 야맹은 살아남았고, 새로운 거지왕 개똥이의 지도 아래 더욱 단단한 조직이 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낮에는 거지였지만, 밤이 되면 한양에서 가장 강력한 정보망으로 활약했다.

    암행어사가 된 포도대장 서준은 때때로 거지촌을 찾았다. 공식적으로는 감시를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거성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진정한 권력은 화려한 관복이 아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르는 정보에 있다는 것을.

    거지들의 밤은 계속된다. 한양의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그림자 세계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질서와 법칙으로 살아간다. 가장 밑바닥에서 세상을 올려다보는 이들이 때로는 가장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진리를 증명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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