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태그 (20개)
#조선후기, #개화파, #수구파, #김옥균, #박영효, #위정척사파, #임오군란, #대원군, #고종, #민씨정권, #근대화, #일본, #청나라, #조선역사, #시니어콘텐츠, #역사드라마, #조선말기, #개항, #개화정책, #전통과근대
후킹멘트 (200자)
"조선 말기, 나라의 운명을 두고 벌어진 치열한 이념 대립!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개화파와 조상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수구파. 이들의 갈등은 결국 피비린내 나는 정변으로 이어졌습니다. 조선의 미래를 놓고 벌어진 숨막히는 정치적 암투를 들어보시오."
디스크립션 (300자)
1870년대 조선,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과 함께 시작된 개화 정책을 둘러싼 치열한 대립을 다룹니다. 김옥균, 박영효로 대표되는 개화파의 근대화 노력과 위정척사파의 강력한 반발, 그리고 임오군란을 통한 대원군의 재집권까지.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흔들렸던 조선 말기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시니어 여러분의 경험과 지혜로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 강화도조약 이후 - 개항의 충격과 혼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 사회는 그야말로 뒤숭숭했다. 수백 년간 쇄국정책을 유지해온 조선이 갑작스럽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궁궐에서부터 시골 마을까지, 모든 곳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을 버리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한성의 거리에는 처음 보는 낯선 물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들어온 새로운 직물, 서양에서 온 신기한 기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충격적이었던 것은 서양식 의복과 문화였다.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보며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두려움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나이 든 어른들은 "이런 것들이 과연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라며 깊은 우려를 표했다.
궁궐 안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아직 젊었지만 왕으로서 나라의 미래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밤마다 신하들과 긴 회의를 가졌다. "우리가 문을 열지 않으면 서양 열강들이 대포로 문을 부술 것이다. 중국도 일본도 이미 그 길을 걸었지 않은가." 고종의 목소리에는 깊은 고민이 배어있었다.
하지만 조정의 원로 대신들은 다른 생각이었다. "전하, 우리 조선은 5백 년간 유교의 나라로 번영해왔습니다. 갑자기 서양 오랑캐들의 문물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어떻게 됩니까?" 이들의 반대는 단순한 보수주의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조선의 전통 문화가 사라질 것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민간에서도 반응은 엇갈렸다. 상인들 중 일부는 새로운 무역 기회를 환영했다. "이제 우리도 더 넓은 세상과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대감을 표현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수공업자들은 걱정이 많았다. 일본에서 들어오는 싸고 정교한 제품들이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의 양반들과 유생들 사이에서는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그들은 "개화"라는 말 자체를 불온한 것으로 여겼다.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찬란한 문화를 버리고 서양 오랑캐의 흉내를 내자는 것인가"라며 분개했다. 이들은 각지에서 상소문을 올려 개항 정책의 철회를 요구했다.
농민들의 반응은 또 달랐다. 그들에게는 당장의 생활이 더 중요했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우리는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세금이 생기고, 일본 상인들이 곡물을 대량으로 사들이면서 쌀값이 오르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궁중에서는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일족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개화 정책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고 했다. 특히 청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청나라를 통해 서양 문물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편 일본에서는 조선의 이런 혼란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이 완전히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조선 내부의 친일 세력을 육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을 일본으로 초청해 새로운 문물을 보여주고, 일본식 근대화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조선 사회는 점점 두 개의 큰 진영으로 나뉘어가고 있었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개화파였고, 다른 하나는 조선의 전통을 지키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수구파였다. 이 두 진영의 대립은 단순한 정치적 견해 차이를 넘어서, 조선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었다.
※ 김옥균과 개화파의 등장 - 새로운 조선을 꿈꾸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적 배경 속에서 김옥균이라는 젊은 지식인이 등장했다. 1851년에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기로 유명했고,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받으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단순히 개인적인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개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으로는 더 이상 이 험난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김옥균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모임을 가질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서양 열강들이 군함을 앞세워 아시아를 침략하고 있고, 일본은 이미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력한 근대 국가로 변신했다. 우리만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다."
김옥균과 함께 개화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 박영효였다. 박영효는 왕족 출신으로 궁중에서의 영향력이 있었고, 김옥균보다는 온건한 성격이었지만 개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배경과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선의 근대화라는 공통된 목표 아래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우리는 단순히 서양 것을 무작정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다." 박영효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의 좋은 전통은 지키면서, 서양의 우수한 기술과 제도를 선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개화의 길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급진적인 김옥균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며 협력했다.
개화파의 핵심 멤버로는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젊고 교육받은 지식인들이었고, 기존의 권력 구조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계층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변화를 통해 조선 사회가 더 공정하고 발전된 사회가 되기를 바랐다.
김옥균은 1881년 일본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그곳에서 그가 본 것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일본이 완전히 다른 나라로 변해있었다. 철도가 놓여있고, 서양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사람들은 서양식 옷을 입고 다녔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교육 제도였다. 모든 국민이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초등교육이 의무화되어 있었다.
"이것이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돌아온 후 동지들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이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개혁 의지와 서양 문물의 적극적인 수용 때문이다.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하지만 개화파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우선 경제적인 기반이 부족했다. 개화 정책을 추진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데, 조선의 국가 재정은 매우 열악했다. 또한 기존의 권력층들, 특히 민씨 일족의 견제도 심했다. 그들은 개화파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
더 큰 문제는 백성들의 반발이었다. 개화파의 정책 중 상당 부분이 서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세금 제도나 징병제 도입 등은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양반들이 일본 흉내를 내려고 우리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는다"는 불만이 퍼지기 시작했다.
김옥균은 이런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점진적인 개혁보다는 과감한 정치적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권력 구조로는 진정한 개화는 불가능하다. 기존 세력을 제거하고 완전히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그의 생각은 점점 급진적인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박영효는 김옥균의 이런 급진적인 성향을 걱정했다. "급격한 변화는 오히려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백성들을 설득하고, 기존 세력과도 협력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김옥균은 "시간이 없다"며 더욱 과감한 행동을 주장했다.
개화파 내부에서도 노선을 두고 갈등이 생겼다. 온건파는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자고 했고, 급진파는 기존 체제를 완전히 뒤바꾸는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내부 갈등은 개화파의 힘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화파는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근대적인 교육 제도 도입, 서양 의학의 도입, 새로운 산업 기술의 도입 등이 그것이었다.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이런 노력들은 조선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 위정척사파의 반발 - 전통을 지키려는 몸부림
개화파의 근대화 움직임이 활발해질수록, 이에 맞서는 보수 세력의 반발도 더욱 거세져갔다. 위정척사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단순한 보수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의 전통 문화와 유교적 가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항로, 기정진, 최익현 등이 있었다.
"우리 조선은 5백 년간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태평성대를 이루어왔다." 이항로는 제자들 앞에서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주자의 학문이야말로 인간이 따라야 할 올바른 길이다. 그런데 지금 어떤 자들이 서양 오랑캐의 문물을 받아들여 우리의 성현한 문화를 더럽히려 하고 있다. 이를 가만히 둘 수 있겠는가?"
위정척사파의 논리는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었다. 그들은 서양 문물의 도입이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정신적 침략이라고 보았다. "기계나 무기 같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에는 그들의 종교와 사상까지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조선 사람이 아니라 서양의 속국민이 되고 만다."
특히 기독교의 전파를 가장 경계했다. 기정진은 "서양 사람들이 조선에 들어와 하느님을 믿으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간 섬겨온 천과 조상신을 부정하는 것이다"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조상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기본 도리인데, 이를 우상숭배라고 하며 금지한다니, 이런 패역한 종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위정척사파는 단순히 반대만 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대안도 제시했다. 그들은 "조선이 약해진 것은 유교 정신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진정한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 백성들이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살게 한다면, 조선도 중국의 당나라나 송나라처럼 찬란한 문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최익현은 특히 실천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농업을 더욱 발달시키고, 수공업을 장려하며, 상업을 적절히 통제한다면 백성들의 생활이 나아질 것이다. 굳이 서양 오랑캐의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는 또한 교육 개혁의 필요성도 주장했다. "더 많은 서당을 세우고, 유능한 스승을 양성하여 백성들이 모두 글을 읽고 예의를 알게 해야 한다."
하지만 위정척사파의 주장에도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대안이 부족했다. 서양 열강의 군사적 압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없었다. "정의가 승리한다"거나 "천이 도와줄 것이다"라는 다소 관념적인 주장에 머물렀다.
또한 위정척사파 내부에서도 노선 차이가 있었다. 일부는 완전한 쇄국을 주장했지만, 다른 일부는 제한적인 개방은 필요하다고 보았다. "청나라를 통해서만 서양과 교류하고, 직접적인 접촉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후자의 입장이었다.
지방의 유생들 사이에서는 위정척사파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그들은 각종 상소문을 올려 개화 정책의 중단을 요구했다. "전하, 신들이 듣기로는 서양 오랑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백성들을 현혹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을 즉시 내쫓고, 개화파 관리들을 엄벌에 처하소서."
이런 상소가 연일 계속되자 고종도 고민이 깊어졌다. 개화의 필요성은 느끼지만, 전통적인 지지 기반인 유생들의 반발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어찌하면 두 편을 다 만족시킬 수 있을까?" 고종은 밤마다 이 문제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위정척사파는 민간 차원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서당에서는 학동들에게 "서양 것은 나쁜 것"이라고 가르쳤고, 마을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서양 문물에 관심을 보이면 엄하게 꾸짖었다.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좋은 것들을 버리고 왜 남의 나라 것을 흉내 내려 하느냐?"
특히 복식 문제에서 갈등이 심했다. 개화파 일부가 서양식 옷을 입고 다니자, 위정척사파는 이를 "조선의 체면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그 나라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 옷을 버리는 것은 우리 정신을 버리는 것과 같다."
종교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을 시작하자, 위정척사파는 이를 "정신적 침략"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이 병원을 짓고 학교를 세우는 것도 결국은 우리 백성들을 기독교도로 만들려는 수작이다. 겉으로는 선행을 베푸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우리 문화를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위정척사파의 주장이 항상 먹혀들지는 않았다. 특히 가난한 농민들은 "양반들의 말씀은 옳지만,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려운데 무슨 여유가 있겠느냐"며 현실적인 태도를 보였다. 서양 의학으로 병이 나은 사람들은 "좋은 것은 좋은 것"이라며 위정척사파의 주장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 민씨 정권과 청나라 - 권력의 이면
개화파와 위정척사파가 치열하게 대립하는 동안, 실제 조선의 정치 권력은 민씨 일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정권은 겉으로는 개화 정책을 지지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권력 유지가 최우선 목표였다. 그들에게 개화든 수구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정책이 민씨 일족의 기득권을 더 확고히 해주느냐는 것이었다.
"개화를 한다고 해서 기존 질서가 완전히 바뀌어서는 안 된다." 민비는 측근들과의 비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기술과 제도는 받아들이되, 권력의 핵심은 여전히 우리가 쥐고 있어야 한다. 김옥균 같은 자들이 개화를 명분으로 우리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민비의 정치적 감각은 매우 예리했다. 그녀는 개화파의 진짜 의도가 단순한 근대화가 아니라 정치적 권력의 재편이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민씨 정권이 선택한 전략은 청나라와의 밀착이었다. 청나라는 여전히 조선을 자신의 속국으로 여기고 있었고,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고 했다. 민씨들은 이런 청나라의 의도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우리가 청나라와 손을 잡으면 일본의 압력을 막을 수 있고, 동시에 개화파의 급진적인 움직임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었다.
1880년 이후 조선에는 청나라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추천하는 관리들을 조선 정부의 요직에 배치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씨 정권은 청나라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조선의 개화는 반드시 청나라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청나라 관리들은 민비와의 면담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일본이나 서양 열강과 직접 교류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 청나라가 중간에서 조절해주겠다." 이는 조선을 청나라의 완전한 속국으로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민씨 정권은 이를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민씨들의 이런 친청 정책은 조선 내부에 새로운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개화파는 "청나라 역시 낡은 체제의 나라인데, 그들을 통해서 무슨 진정한 개화가 가능하겠는가"라며 반발했다. 김옥균은 "민씨들이 자신들의 권력만 생각하고 나라의 앞날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위정척사파도 마찬가지로 불만이 많았다. 그들은 "청나라를 통한 개화든 일본을 통한 개화든 결국은 우리의 전통을 훼손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일부 위정척사파는 "차라리 완전한 쇄국이 낫다"며 더욱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이런 복잡한 정치적 계산보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더 중요했다. 청나라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청나라 상인들이 대거 들어와 조선의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은 생계에 위협을 느꼈다. "왜 우리나라 장사를 중국 사람들이 다 해먹는가"라는 불만이 쌓여갔다.
민씨 정권의 또 다른 문제는 부패였다. 권력을 이용해 각종 이권을 독점하고, 새로운 사업에서 나오는 이익을 독차지했다. 개화 정책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기술이나 상품들도 민씨 일족과 관련된 상인들이 독점적으로 취급했다. "개화를 한다면서 결국 양반들만 배불리고 백성들은 더 가난해진다"는 원성이 높아졌다.
고종은 이런 상황에서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 명목상으로는 왕이었지만, 실제 권력은 민비와 민씨 일족이 쥐고 있었다. 청나라의 압력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내가 진정한 왕인가, 아니면 그저 허수아비인가"라는 자괴감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한편 일본은 이런 조선 내부의 복잡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조선 내부의 친일 세력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일본은 개화파 일부와 접촉하여 "일본이야말로 조선이 배워야 할 진정한 개화 모델"이라고 설득했다.
민씨 정권의 친청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선을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청나라에 의존할수록 조선의 자주성은 약해졌고, 일본과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불만이 계속 쌓여가고 있어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상황이었다.
※ 임오군란의 폭발 - 백성들의 분노
1882년 여름, 조선의 수도 한성은 무더위와 함께 백성들의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개화 정책이 시작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조선군 병사들의 처지는 참담했다. 몇 달째 제대로 된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고, 겨우 받은 급료마저 모래가 섞인 쌀로 지급되어 먹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쌀이냐!" 한 병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모래가 반이나 섞여있어서 어떻게 먹으라는 거냐!" 병사들은 창고에서 나온 썩은 쌀과 모래 섞인 양식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들의 분노는 단순히 급료 문제만이 아니었다. 새로 들어온 일본식 훈련, 서양식 군복,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무시하는 개화파 관리들의 태도에 대한 오랜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훈련도감의 민겸호라는 관리의 오만한 태도였다. 병사들이 급료와 식량 문제로 항의하자, 그는 "너희들이 뭐라고 감히 나라의 정책을 비판하느냐"며 몇 명을 구타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수백 명의 병사들이 들고일어났다. "민겸호를 내놓아라!" "우리를 개돼지로 아는가!"
폭동은 순식간에 전체 군영으로 번졌다. 오랫동안 쌓인 불만이 한순간에 터진 것이었다. 병사들은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그들의 요구는 명확했다. 부패한 관리들의 처벌, 제대로 된 급료와 식량 지급, 그리고 일본식 훈련의 중단이었다.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의 방식으로 훈련받겠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분노한 병사들은 민겸호의 집을 습격했고, 개화파 관리들의 집도 공격했다. 일본인 고문관들도 위험에 처했다. 일본 공사관도 공격받아 일본인들은 급히 피난해야 했다. "일본 놈들을 모두 내쫓자!" "개화파 매국노들을 처단하자!"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백성들이 대원군의 복귀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원군을 모셔와야 한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퍼졌다. 그들에게 대원군은 전통을 지키고 외세의 침입을 막아낸 상징적인 존재였다. "대원군께서 계실 때는 이런 일이 없었다!" "대원군께서 나라를 바로 세워주실 것이다!"
운현궁에 유배되다시피 지내고 있던 대원군은 이 소식을 듣고 복잡한 심정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축출한 민씨 정권이 몰락하는 것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가 이렇게 혼란에 빠진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대원군은 결국 민심의 부름에 응답했다. 병사들과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궁궐로 향했다.
거리는 "대원군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12년 만에 정치 무대로 복귀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나라가 바로 설 것이다!" 사람들의 기대감은 하늘을 찔렀다. 민비와 민씨 일족은 급히 피난길에 올랐고, 민겸호를 비롯한 개화파 관리들도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숨어야 했다.
대원군은 즉시 개화 정책의 중단을 선언했다. 일본인 고문관들을 내쫓고, 서양식 훈련을 폐지했다. 전통적인 조선의 제도를 부활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방식대로 살겠다!" 위정척사파들은 대원군의 복귀를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임오군란의 성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민비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대원군 정권이 일본과 완전히 결별할 것을 우려한 청나라가 개입한 것이었다. "조선의 안정을 위해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 청나라의 명분이었다.
청군의 개입으로 상황은 또다시 급변했다. 무력으로는 청군을 당할 수 없었던 조선군은 다시 해산되었고, 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백성들의 꿈같던 희망은 불과 몇 주 만에 무너져버렸다. "우리의 승리가 이렇게 끝나다니..."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 대원군의 재집권 - 역사의 아이러니
임오군란을 통해 잠깐이나마 권력을 되찾았던 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가는 모습은 조선 정치사의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 중 하나였다. 한때 조선을 철권통치했던 그가 이제는 외국 군대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백성들이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대원군의 복귀는 불과 몇 주 만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내 운명인가..." 대원군은 청나라로 향하는 길에서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12년 전 민씨 정권에 의해 축출당했을 때도 억울했지만, 이번에는 외국 군대에 의해 끌려가는 치욕을 당하고 있었다. "내가 조선의 독립을 지키려고 그토록 노력했는데, 결국 이런 일이..." 그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절망이 교차했다.
청나라 톈진에서의 유배 생활은 대원군에게 깊은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추진했던 쇄국 정책과 위정척사 노선이 과연 옳았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서양 세력을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청나라라는 또 다른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독립인가?" 현실의 복잡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민씨 정권이 청군의 힘을 빌려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청나라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커져서, 조선은 사실상 청나라의 보호국이 되어버렸다. 원세개가 조선 주재 청국 총영사로 부임하면서, 그의 허락 없이는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권력을 되찾기는 했지만, 과연 이것이 진정한 승리인가?" 민비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대원군을 제거하고 개화파의 도전도 막아냈지만, 그 대가로 조선의 자주권을 상당 부분 청나라에 넘겨주어야 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치른 대가가 너무 컸다.
개화파는 임오군란의 실패로 큰 타격을 받았다. 김옥균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고, 조선 내에서의 개화 운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우리의 꿈이 이렇게 쉽게 무너져버리다니..." 김옥균은 일본에서 절치부심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위정척사파들도 혼란스러웠다. 대원군의 복귀를 그토록 환영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청나라의 개입을 불러왔다. "우리가 바란 것은 조선의 전통 회복이었는데, 왜 이런 결과가..." 그들은 현실 정치의 복잡함을 새삼 깨달아야 했다.
가장 실망한 것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대원군이 돌아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부패한 관리들이 처벌받고, 무거운 세금 부담이 줄어들고, 일본인들의 횡포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청군이 주둔하면서 군량미 부담이 더 늘어났고, 정치적 혼란으로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변화가 이런 것이었나?" 서울 거리의 한 상인이 한탄했다. "대원군님이 돌아오시면 모든 것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백성들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성찰이 시작되었다. "단순히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도, 무조건적인 개화도 답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선의 현실에 맞는 독자적인 길"이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3년 후인 1885년, 대원군은 청나라에서 풀려나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예전의 대원군이 아니었다. 나이도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현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어 있었다. 돌아온 대원군은 이전처럼 강경한 쇄국 정책을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명한 외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오군란과 대원군의 일시적 재집권은 조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사건을 통해 조선 사회의 모든 계층이 현실의 복잡함을 깨달았다.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로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느꼈다. 또한 백성들의 정치 의식이 크게 성장했음을 보여주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백성들이 직접 정치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조선 역사상 매우 드문 일이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개화파와 수구파의 치열한 대립, 그리고 임오군란까지. 조선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전통을 지키려는 마음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열망, 그 어느 것도 틀리지 않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과 참 닮아있지 않나요? 다음 이야기에서는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 3일천하의 꿈'을 다뤄보겠습니다. 개화파의 마지막 도박이었던 갑신정변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실패했는지, 그 치밀했던 계획과 아쉬운 결말을 함께 들어보시죠. 다음 영상에서 만나요!"